사당(祠堂)

 

사당(祠堂)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곳으로 가묘(家墓)라고 도 한다.

사당에는 3년상 마친 신주를 모시는데, 사당 안에는 4감(龕 : 신주를 모셔 놓는 장)을 설치하여 4대조를 봉안하며, 감 밖에는 장(帳)을 드리우며 각 위패마다 제상을 놓고 그 위에 촛대 한쌍씩을 놓으며 최존위(崔尊位)는 향상(香床)을 놓는다.

 

서원(書院)

조선 중기 이후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인재(人才)를 키우기 위해 세웠던 민간 사학기관이다.

처음에는 제사만 지내는 기능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542년(중종37년) 경상도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관내 순흥 백운동에 고려 유교의 중흥자 안 향(安 珦)의 옛날집이 있음을 알고 그 곳에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유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이것이 사(祠)와 재(齋)를 겸비한 최초의 서원으로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이다. 그 뒤 퇴계 이 황(李 滉)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명종으로부더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받고 노비에 대한 면세 면역의 특권을 내렸다.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으며 때마침 쇄퇴해 가는 향교(鄕校)를 대신하여 국가의 보조를 받는 서원이 각 처에 생겼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제사를 지내며 유교적 향촌질서를 유지하고 시정(時政)을 비판하여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을 형성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양적 성장을 가져오면서 혈연· 지역관계나 학벌 사제 당파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민들의 이익 집단화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또한 양민이 서원의 노비로 들어가 군역(軍役)을 기피하고, 유생들도 학문대신 붕당(朋黨)을 형성해 당쟁에 빠져 국가를 분열시키는 폐단을 가져왔다.

따라서 영조 ·정조 ·철종 등은 서원 정비에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특권계급의 이해 관계 때문에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 후 1864년(고종1년) 대원군이 섭정하면서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없애고 서원의 설치를 엄금하는 등, 적극적으로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가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지금도 경상도 순흥에 소수서원(紹修書院 : 안 향), 전라도 장성에 필암서원(筆巖書院 : 김인후), 경상도 선산에 금오서원(金烏書院 : 길재), 경상도 예안에 도산서원(陶山書院 : 이 황), 경기도 고양에 기공사(紀功祠: 권율), 전라도 태인에 무성서원(武城書院 :최치원), 경기도 포천에 용연서원(龍淵書院 : 이덕형), 경상도 안동에 병산서원(屛山書院 : 유성룡)등이 각처에 흩어져 있다.

 

비각(碑閣)

비석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로 가로상에 설치하거나 사찰, 능묘에 설치한다.

 

정려(旌閭)

특별한 행실에 대하여 국가에서 내려 주는 표창인데, 충신(忠臣) 열녀(烈女) 효자(孝子)등을 표창하고 후세들에게 길이 본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영당(影堂)

한 종파의 조사(祖師 : 한종파를 세우고 그 종지(宗旨)를 열어 주장한 사람), 한 절의 개조(開祖), 또 이름난 인물의 화상(畵像)을 모신 사당. 영전(影殿)

 

호당(湖堂)

조선 세종 때 장래가 촉망되는 젊고 재주있는 문신들에게 국가에서 장소를 제공하여 수양과 학문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던 곳, 독서당(讀書堂)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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