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공파 시조 임 윤(任 尹)

 

公이 이름은 윤(尹)이요 자(字)는 군빙(君聘)이다. 우리 豐川任氏의역사(歷)史는 고려충렬왕(高麗忠烈王) 때의 어사대부(御史大夫) 주(澍)에서 비롯한다.

주(澍)가 1283年에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를 지낸 것이 경상도 선생안(慶尙道 先生案)에 실려 있고 그의 아들 자송(子松)은 판신조적(叛臣曹由頁)을 토평(討平)한 공(功)으로 서하(西河)부원군(府院君)에 봉(封)하고 벼슬이 시중(待中)에 이르렀다.

 

府院君의손(孫) 구(球)가 한양조(漢陽朝)에 벼슬하여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가 되었고 그의 아들 생원(生員) 복생(復生)은 좌통례(左通禮)에 추증(追贈)되었으니 곧 公의 고조(高祖)이시다. 그 의아들 교수(敎授) 장손(長孫)은 증직(贈職) 좌승지(贈職左承旨)요 그 의아들 훈도(訓導) 제(濟)는 증직(贈職)이조판서(吏曹參判)이요 그의 아들 명필(明弼)은 남부참봉(南部參奉)으로 증직(贈職)이 좌찬성(左贊成)이었으니 곧 公의 아버지요 어머니는 贈 정경부인(貞敬夫人) 해평 윤씨(海平尹氏) 첨정(僉正) 훤(萱)의 따님이다.  

公이 1501年(燕山君七年辛酉)에 출생(出生)하여 34歲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고 38歲에 문과(文科)에 올랐다. 명종실록(明宗實錄)에 나타난 것을 보면 명종(明宗) 13年에 王의 특지(特旨)로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이 되고 다음해에 전라어사(全羅御使)가 되어 궁민구호실정(窮民救護實情)을 감찰(監察)하고 同16年에 황주목사(黃州牧使)가 되었다.

 

보첩(譜牒)에는 公의 관직(官職)을 양주목사(楊洲牧使)라 하였으나 실록(實錄)에는 이 기사(記事)가 누락(漏落)되였다. 선조(宣祖) 때에는 서반직(西班織)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래 있었고, 오형도총부(五衡都摠府)의 형장(衡將)을 맡기도 하였다. 선조(宣祖) 2年에 동지부사(冬至府使)에 임명(任命)되여 정사(正使) 이언경(李彦璟 )서관장(書狀官) 권(權?)와 함께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선조(宣祖) 이후(以後)의 사적(史蹟)은 미암 유희춘(眉岩 柳希春) 수필일기(手筆日記)에 (단편적(斷片的)으로 나오는 기록(記錄)에 의하여 알게 되었다. 미암(眉岩)은 이름 높은 유학자(儒學者)로 문집(文集) 이외(以外)에 수종(數種)의 저서(著書)를 남겼고 특히 그의 일기(日記)에는 사료(史料)로서의 가치(價値)가 높다.

 

公과는 동시(同時)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자주 과종(過從)한 것이 일기(日記)에 보이며 또한 公이 17歲 되던 선조(宣祖) 四年 九月에는 함께 등과(登科)한 임내신(任鼐臣), 원호섭(元虎燮), 이담(李湛), 유희춘(柳希春) 等을 초청(招請)하여 동년회(同年會)를 열었는데 이때에 경기도사(京畿都事)인 아들 국노(國老)가 잔치를 성대히 차렸다고 일기(日記)에 적혀있다.

 

公의 춘추(春秋)가 얼마였는지는 보첩(譜牒)에 기록이 없으나 일기(日記)에는 1574年 선조宣祖 8年 갑술(甲戌) 까지 公의 기사(記事)가 있는 것으로 보아 74歲 이상(以上)의 고수(高壽)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우리집안은 통예공(通禮公)이래(以來)로 가세(家勢)가 부진(不振)했는데 公의 대에 이루러 公 및 아우 열(說)과 여(呂)가 모두 등과(登科)하고 또 열(說)은 중시(重試)와 발영시(拔英試)에 까지 합격(合格)하여 10년 사이에 형제 3인(兄弟三人)이 대소 9과 (大小九科)에 올랐고 열(說)은 벼슬이 한성판윤(漢城判尹)이고 여(呂)는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러 일시(一時)에 가문(家門)의 영광(榮光)이 세상에 빛났고 이로 인하여 고조 이하(高祖以下) 四代에 관직(官職)이 추증(追贈)되였다.

 

부인(夫人)은 안동 권씨(安東權氏) 창수(倉守) 사걸(四傑)의 따님이다. 二男 一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정노(廷老)는 진사(進士)로 자산군수(慈山郡守)요 국노(國老)는 문과(文科)에 올라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公에게는 이조판서(吏曹判書)夫人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이 추증(追贈)되였다.

녀서(女婿)는 이응린(李應麟)이다. 정노(廷老)의 아들은 진사(進士) 홍정(弘正)이요 그의 아들 효달(孝達)은 문과(文科)로 우승지(右承旨)를 지냈다.

 

국노(國老)의 아들은 삼형제(三兄弟)가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몽정(蒙正)은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취정(就正)은 예조판서(禮曹判書), 수정(守正)은 교리(校理)를 지냈고 효행(孝行)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추증(追贈)되였다.

 

몽정(蒙正)의 아들은 선후(善後)와 개성유수(開城留守) 길후(吉後)요. 취정(就正)의 아들은 남평 현감(南平縣監) 석후(錫後), 태인 현감(泰仁縣監) 경후(慶後), 직장(直長) 광후(光後), 문과(文科)로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낸 흥후(興後)요 수정(守正)의 아들 덕후(德後)는 문과(文科)로 예조정랑(禮曺正郞) 여후(汝後)는 사산감역(四山監役), 후(有後)는 문과(文科)로 도승지(都承旨)를 지냈고 뒤에 또한 효행(孝行)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정희공(貞僖公)의 시호(諡號)가 추증(追贈)되였고, 다음은 지후(之後)다.

 

현손이하(玄孫以下)의 기록(記錄)은 이를 생략(省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