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16-07-18 (월)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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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흥후(任興後) 한국역대인물사전 수록



임흥후(任興後)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784D765D6C4B1596X0

천주(天胄)
생년
1596(선조 29)
졸년
?(미상)
시대
조선중기
본관
풍천(豊川)
활동분야

문신 >문신




임취정(任就正)
조부
임국로(任國老)
증조부
임윤(任尹)
외조부
경시제(慶時穧)


[관련정보]

[문과] 광해군(光海君) 8년(1616) 병진(丙辰)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2위(5/10)
[생원시] 광해군(光海君) 7년(161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63위(93/100)
[진사시] 광해군(光海君) 7년(161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3위(8/100)

[상세내용]
임흥후(任興後)에 대하여
1596년(선조 29)∼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천주(天胄). 임윤(任尹)의 증손으로, 조부는 판서 임국로(任國老)이고, 부친은 판서임취정(任就正)이며, 모친은 경시제(慶時穧)의 딸이다.
1616년(광해군 8)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었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 논의에 참여하여 국모로 대접할 수 없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 뒤 정언‧시강원사서를 역임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문한(文翰)의 자질을 갖춘 인물로 이이첨(李爾瞻)의 추천을 받았으며, 이어 이조좌랑‧겸문학을 거쳐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마음대로 자기 당류를 심었다는 것으로 관직이 교체되었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인조 1) 폐모 논의 때 국모로 대접할 수 없다는 견해를 내었다는 것으로 멀리 유배되었다.
1628년(인조 6) 반역을 도모한 유효립(柳孝立)의 옥사 때 다시 진도(珍島)로 유배되어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다.
이듬해 후금(後金)과 통하여 역모를 꾀한 양경홍(梁景鴻) 사건에 관련되어 심문을 받았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仁祖實錄國朝榜目燃藜室記述大東野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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