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간행내역
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16-07-16 (토) 12:30
ㆍ추천: 0  ㆍ조회: 543       
ㆍIP: 211.xxx.55
풍천임씨세보 (구) 정평 신유보 (1681)년 정평에서 초간
구 신유보  서문
(정평부에서 처음 간행 할 때)

우리 임씨가 풍천(豐川)을 본관으로 하고 휘 온(溫)으로 -부터 기술(記述)하기 시작하여 아드님 가규(可珪), 아드님 비(備), 아드님 도(徒), 아드님 천유(天裕)로 전해왔는데 이 五대는 중국 소흥부(紹興府) 자계헌(慈溪縣)사람이셨다.

아드님 주(澍)께서 비로소 우리 동국으로 오셨다는 것인데, 옛 보첩(譜牒)에 이르기를, [그분이 오시매 나라에서 본적을 풍천에 내려주시고 거처하실 집을 송도(松都 (개성開城)) 창선방(昌善坊)에 내려주었다] 고 하였으나 옛 보첩의 기록이 매우 간략하고 소루(疏漏)하여 비록 그 지파(支派)를 나누어 놓긴 하였으나 혹은 빠트리기도 하였는데 종중의 선철(先哲)도 이를 상세하게 기술하여 밝힌 것이 없으니 이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 종인들의 논의에는 [중국으로부터 오셨다고 일컫는 것은 기술이 간략하여 증신 하기에 부족하고 세대(世代)또한 멀어서 고징할만한 것이 없는데 만약 전래하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 기록한다면 혹시 선조를 무망(誣罔)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두려우니 이심스러운 것은 차라리 궐(闕)해버리는 것이 낫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이 말이 신중하고도 질박하나 나는 그 의혹을 풀길이 없으니 우선 문적(文籍)과 가첩(家牒)에 나타난 것을 추려 뽑고, 다시 널리 세상에 전해오는 말들을 취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선조 주(澍)께서 고려 충렬왕(忠烈王)을 섬기시어 일찍이 영남 안찰사(按察使)를 역임하시고 감문위 대장군(監門 大將軍)으로 벼슬을 마치셨는데도 항상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일컬어 왔으며 부인은 창덕(昌德) 진(陳)씨시니 홍도(弘道)의 따님이시며 분묘는 풍천부 남쪽에 모셔져 있는데 지금도 잘 수호되고 있다.
두 아드님 자송(子松).자순(子順)을 두셨으니 이는 보첩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전하는 자 이르기를,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陪從)해 오셨다] 하나 그 노국이라 함은 잘못된 것이다.
고찰하건대 충렬 왕이 세자(世子)로 연경(燕京)북경(北京)에 있다가 원(元)나라 세조(世祖)의 홀도로공주(忽都魯公主)와 결혼하였는데 원종(元宗)이 서거(逝去)함을 듣고 귀국하여 즉위(卽位)하고는 사신을 보내어 공주를 맞아 왔으니 이것이 바로 지원十一년 (서기1274년) 갑술 해 이었다. 그 다음해에 송(宋)나라의 어린 임금이 연경에 갇혔으며, 고려와 원나라는 이미 사위와 장인의 친척관계를 맺어 한 집안이 되었는지라 공주도 그의 관부(官府)를 개설하고 요속(僚屬)까지 두었었으니 그를 호위 배종하는 관원에게는 관가에서 전장(全庄)도 주고 후한 녹봉을 주었을 것은 의당 있음직한 알이다.
영남감영지(嶺南監營志)에 이르기를, [선조께서 지원 계미년 추동(秋冬기)에 안찰사가 되셧다고 하였는데 이는 갑술년으로부터 꼭 10년이 되는 해이다.
중국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에 귀화한 자를 신라. 고려 양조(兩朝)에서 존대하고 은총하기를 마치 쌍학자(雙學士)처럼 한 사례가 많았는데, 이미 목숨을 바쳐 신하가 되었으니 현달함직도 하나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전하는 자 이르기를 [본디 송나라의 신하로서 나라가 패망하자 도망해 왔다]고도 하나 이 말은 지극히 막연한 것 이이어서 전혀 상고할 길이 없다 .
그러나 의심할만한 것이 있으니 원나라가 북녘 오랑캐로서 중국에 들어가 군주가 되고서는 항상 한인(漢人)들을 노비로 부렸으며. 백안(白顔(몽고사람 원나라장수) 이 임안(臨安)으로 처 들어가 삼궁(三宮)과 백관(百官), 그리고 국자(國子)의 유생들을 포로로 잡아 북녘으로 옮겨 간 것으로 보아 송나라 신하로서 공주를 배종하여 왔다함도 괴이할 것이 없는 것이다. 옛날 진(晋)나라 헌공(獻公)이 우(麌)나라를 벌하고 우공(麌公)과 정백(井伯)백리해의字)을 잡아다가 진(秦)나라 목희(穆姬)를 배종토록 하였으니 춘추(春秋)시대에도 이미 이와 같이 무도(無道)하였는데 오랑케인 원나라라 하여 이런 일을 못 하였겠는가? 나의 논리를 감히 스스로 옳다고 기필하지는 않으나 특히 세전(世傳)해오는 설화에 근거를 두고 사가(史家)의 말도 참작한 것이어서 남들이 나를 전혀 허탄(虛誕)하다고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아! 선조의 사적(事跡)을 지금에 와서 다 알기는 어려운 것이다.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고 , 믿어운 것은 믿어운대로 전하는 것이 곧 역사를 기술하는 방법인지라 족보를 편수하는 자도 마땅히 이를 본받아야 할 것이니, 옛 족보라 하여 다 민몰(泯沒)케 하며 세전해온 말이라 하여 다 배척하겠는가?

이지봉(李芝峯) (이수광)이 중국으로부터 나온 동방의 대성(大姓)을 내리 헤이면서 풍천 임씨를 남양홍씨(南陽洪 氏). 연안 이씨(延安李氏)와 나란히 열거하였고, 이월사(李月沙)이정귀는 임씨의 묘에 기술하기를 [어사공께서 비로소 풍천 임씨가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어사공께서 비로소 풍천에 관적(貫籍)을 두엇 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임씨가 중국으로부터 온 것을 믿으나 송나라 신하라던가 공주를 배종했다는 설은 본디 기연 미연의 사이에 덮어두고 싶다.
그 뒤에 맏아드님 자송공은 공훈을 세워 봉작(封爵)되였고 둘째아드님 자순공도 경재(卿宰)의 반열에 이르셨다.
어사공이 영남을 안찰하신 해로부터 110년을 지나서야 우리 태조(太祖)께서 혁명하신 원년이고 보면 지금까지 연면하게 이어져 온 것이 400여년이 되며 사방에 흩어져 사는 우리 임씨를 이루 다 기록할 수는 없으나 모두가 백중 양공의 후손인 것이다. 그러나 중공의 후손이 더 성빈(盛빈)하고 많아서 그 수효를 백공에 비하면 마땅히 갑절이나 되겠지만 알려진 사람과 큰 인물들이 세상에 혁혁한 명예를 떨친 것은 백중 양파가 동일하다.
우리 종장(宗丈) 영(暎)씨가 정평부사(正平府使)로 나가 나에게 서면으로 통보해 오기를[내가 족보를 간행하려고 한다] 하기에 어려운 문제들을 내가 변명해 보려고도 하였는데 미쳐 그곳에 가서 전형(銓衡)하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다시 글을 보내오기를 [족보가 바야흐로 인쇄에 들어가고 있다 그대는 마땅히 서문을 지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나는 감히 이를 사하하지 못하고 드디어 그 원본을 상세히 살펴 세첩(世牒)에서 누락된 것을 보충하려 하나 과연 우리 종인들의 의사에 합당할는지 의문이다. 인하여 고하기를 [백중공 양파는 마땅히 상하편(上下編)으로 해야 할 것이며, 다만 외손(外孫)만 기록하고 그 이하는 내치지 말도록 할 것이니 이는 번다(繁多)하기만 할뿐,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을 우려함이요, 농촌에 내려가 묻혀 있어 그 계대를 밝히지 못하는 자는 아직 궐해 두었다가 후일 현달하는 자가 나오기를 기다려서 다시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아! 옛날의 종족을 수합하던 그 법도가 지금은 없어지고 말았다. 진실로 이 보첩이 세상에 행하여진다면 대소(大小)의 종족을 분별해 주고 소목(昭穆)의 서차를 가려주며 원근의 친족을 나누기에 족할 것이니 이것이 풍속과 교화에 관계되어 인간의 상성(常性)을 후하게 회복하는데에 작용이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임씨가 성번한 씨족으로 호칭되어 오는데도 기록은 아직도 크게 갖추어지지 않고 있으니 이는 우리 종중의 수치이다. 그런데 이제 영씨가 솔선하여 창도(倡導)하셨으니 이를 이어 더 닦아서 실추(失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후대에게 있지 않겠는가?
이를 모든 종인들과 더불어 다 같이 힘쓰려고 한다.


                                                                  신유년 섣달 상완(上浣)에
                           후손 이조참의(吏曹參議) 상원(相元)은 삼가 서(序)함.
   
  0
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