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간행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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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2016-07-13 (수)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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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구) 정조 정사보 (1797)년

 
 



     (정조 정사보 서)

 우리임씨가 옛날에 족보가 있어 증조부 염헌(염軒)공 임상원任相元)공이 서문을 지으신바 있는데 그 족보가 매우 간략 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어사공이 비로소 동국으로 나오셨고 풍해군(風海郡) 이상의 五대는 곧 중국 소흥부(紹興府) 자계현(慈溪縣) 사람이시다] 하나 그 말이 너무도 막연한 지라 소암(疎菴 임숙영(任叔英)의 별호) 만휴당(萬休堂) 임유후(任有後)의 별호) 및 염헌 제공이 일찍이 그것이 오류가 아닌가 하여 의심도 하셨으나 이를 고증할 만한 문적이 없어서 감히 옳지 않다고 단정하지는 못하셨다.
 그 백여 년 뒤에 족대부(族大父) 목사(牧使) 과(簻)공이 경주(慶州) 토암산(吐巖山) 불국사(佛國寺)를 지나다가 그 절에 간직되어 있는 옛 사적과 선생안(先生案)등을 열람한바 우리 시조와 어사공의 휘자가 있었고, 풍천종인이 본부 남쪽 박달산(朴達山) 아래 도곡리(陶谷里)에 살고 있었는데, 그 마을부근 신좌(辛坐) 산에서 단절된 한 비석을 얻었는데 그 비면에 검교공(檢校公)의 성과 휘 자가 있었다.
절에 간직되어 있는 문적의 기재도 천와(舛訛)가 없지 않았고, 비에 새겨진 문체(文體) 또한 지금과는 크게 다른 바 있어 오랜 옛일을 무리하게 해석할 수는 없으나 요컨대 중국인이 아니 엇음이 이에서 결단 되였다.
애석하도다.
전인들이 이런 사실을 미처 듣지 못하고 가심이-
영종(英宗) 계해 년 (영조19년 서기1743년) 에 여러 종인들이 모두 모여서 족보의 평수를 의논한 나머지에 [부원군과 전서 공, 즉 백중(伯仲) 양파의 지손들이 다 같이 번성하여 상. 하편(上下編)으로 나누어서 만드는 것이 (고열(考閱)하기에 편리하다 하여 드디어 각각 그 자손에게 위임하여 이를 주관케 하고는 전후 두 번이나 단자를 거두어서 차례로 권질(卷秩)을 이루니 지금까지 50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종족(宗族)의 수합을 되도록 널리 하기 위하여 의심스러운 것과 미더운 것을 아울러 전하였으며, 주록(註錄)은 일체 원단(原單)을 따르다 보니 상밀(詳密)함과 소략(疏略)함이 같지 않으나 이 또한 보가(譜家)들의 면할 수 없는 일이다.
씨족의 기록이 있었다는 것을 옛날에는 듣지 못했는데 중국 송대(宋代)에 이르러 비로소 있었으니 여릉(廬陵) 구양씨(歐陽氏)와 미산(眉山) 소씨(蘇氏)의 족보 같은 것을 볼 수 있으나 이를 오늘날 사람들의 기술에 비하면 너무 소략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어찌 박하다고 이르랴?
족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단지 그 세계(世系)의 기술만이 아니요 선조의 신고(申告)로 한 문호(門戶)를 수립하여 그 후손을 비호하게 된데 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으니 임씨의 상세(上世)에 문학(文學)으로 현달한 분이 많았으니 벼슬길에 나와서는 세상에 공헌하고 물러나서는 가정에서 행한 것들을 대강은 알 수 있다.
質樸)한 면이 많고 부화(浮華)한 면은 적었으며 구차하게 남다른 태도를 취하여 고고(高古)함을 표방하지도 않거니와 구차하게 부합(附合)하여 아첨을 구하지도 않으면서 급급(汲汲)하게 남에게 추종하지 않고 조용히 살아왔으며 세도(世途)에 분주하게 따르지 않고 고졸(古拙)한 규범을 지켜왔다.
다만 지금은 년대가 오래되어 전형(典型)은 멀어졌으나 끼치신 교화와 사업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있다.
서울과 시골에 흩어져 살고 있어 벼슬길에 나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한 것은 혹 다르다 할지라도 대략은 시서9詩書)를 가업으로 삼을 만하고 문자(文字)를 귀하게 역일만 하다는 것은 알고 있는지라 비록 세리(勢利)의 길이 어긋나고 공명(功名)의 기회에 어둡다 하더라도 역시 거의 그 몸과 가정을 보전하여 그의 선조를 욕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네 선조를 사모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닭을 지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일찍 일어나서 밤늦께 잘 때 까지 너를 나아준 부모에게 욕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모든 우리 종인들은 이에 힘쓰고 힘쓸지어다.

                      후손 숭록대부 판돈영부사 겸 판의금부사 희증(希曾)은 삼가 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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