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록
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16-07-21 (목)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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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5世 삼한동덕찬화공신 임천유(任天裕)



5世 임천유(任天裕) 삼한동덕찬화공신(三韓同德贊化功臣)
 
옛적부터 내려오는 족보에는 공은 삼한동덕찬화공신(三韓同德贊化功臣)으로 풍해군(豊海君)의 봉작을 받았다고만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약 300년 전인 이조 영조 때에 공의 묘지(墓誌)의 깨어진 조각이 나타나서 공의 무덤의 소재가 알려졌다. 곧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도곡동 은 옛적에는 풍천부(豊天府)에 속한 땅인데 이곳이 박달산(朴達山)이란 큰 산이 있고 산 밑에 옛적부터 내려오는 무덤이 있어 지방 사람들이 이것을 곧 풍해군의 무덤이라고 구비로 전해내려 왔었다. 그러다가 1733(영조9)年에 이 무덤 아래 50미터쯤 되는 곳에서 깨어진 돌조각이 발견 되였는데 여기에는 임(任)이라는 글자 한 자만 있었으므로 이것만 가지고서 공의 무덤이라고 단정을 내릴 수가 없어서 그대로 있다가 1786(정조10)년에 곧 54년 뒤에 이 지방에서는 임봉겸(任鳳謙)이라는 분이 나무를 캐다가 무덤 왼편에서 비석파편을 발견했다. 크기가 말(斗)만한데 왼쪽에는 깨져나가고 글자가 있는듯하나 많이 마멸되어 알아볼 수가 없고 첫줄에는 [아버지는 임도任徒)라고 하고 다음 줄에는 어머니 안씨(顯母妣安氏) 라고 하였고, 다음 줄에는 아들 봉직랑(孝子奉直郞) 이라 하여 모두 3줄 15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비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무덤이 풍해군의 무덤으로 확정을 지었고 그의 아버지인 검교대장군(도(徒)와 함께 여기서 해마다 제사를 드리기로 결정하게 되었으며 이 사실을 기록하여 후손인 대사헌(大司憲) 희증(希曾)
이 글을 지어 무덤 앞에 비를 세웠다. (1786(정조10)년 이로 인하여 어사공주(澍) 이상은 모두 중국 사람이었다는 종래의 족보에서 기록된 것은 그 가치가 희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발견하였다는 그 비석 자체도 의문점이 없지 않으므로 앞으로 정확한 자료가 더 발견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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