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록
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20-04-23 (목)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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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20世 임치원(任致遠) 문헌
20世 임치원(任致遠) 1695(숙종21)생 ~ 1770(연조46)졸

자는 사근(士近) 조정(道鼎)의 아들이요, 만휴당(萬休堂) 任有後의 증손이다.
공은 의표가 엄숙하고 성품이 관후하였다.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하고 일가 간에 화목하였으며, 특히 불우한 사람을 잘 도와주었다.
1724(경종4)년에 아버지가 서관(西關)에 가다가 도중에서 병이 들었는데 고이 서울로 모셔와 석 달 동안을 시탕(侍湯) 하다가 돌아가시게 되매 몹시 애통해 하였고 동모(同母)의 동생 8남매와 서제(庶第) 5남매를 모두 양육(養育)하고 고루분재(分財)해 주어 살게 하였다.
1730(영조6)년에 음죽(陰竹)으로 이주(移住)한 뒤 두해 거듭 흉년이 들었는데 친척 60가구가 공에게 의탁해온 것을 모두 구제해 주었고,
1742(영조18)년에 또 전염병이 성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공은 이웃과 친척 중에 빈한한 사람이 초상. 장례비용을 대신 부담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공을 남해관음(南海觀音), 또는 영남 대협(嶺南大俠) 이라 하여 그 자선(慈善)과 의협심(義俠心)을 칭송하였고, 음죽(陰竹)현감 이인상(李獜祥)은 공을 한번만나보고는 그 높은 인품을 평하여 당대의 노중련(魯仲蓮)이라고 까지 일렀다.
힘이 세어 말 한 마리를 옆에 끼고 산에 오르고, 쇠고리를 맨손으로 펼 수 있었으나 일체 남에게 표시하지 않았는데 족질(族姪) 정(珽)이 나라에 무장(武將)으로 추천하고자 하는 것을 엄중이 꾸짖어 거절하였다.
만휴당(萬休堂)문집5권을 간행(刊行)하였고 또 정희공(貞僖公)의 효행 정려(旌閭)와 5대 조비(五代祖妣)한씨(韓氏)의 열녀문(熱女門)을 세웠다.
묘는 음죽 서면 세필리 (陰竹 西面 細筆里) 자자(子坐)에 있다.
실(室)은 대구서씨(大邱徐氏)다.


출처 : 豊川任氏 文憲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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