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관리
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16-07-17 (일)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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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17世 승지공 (諱孝達) 墓碑文
임효달 墓碣銘
저자 任相元

공(公)이 세상을 떠난 지 38년이 지난 뒤에 사자(嗣子)인 임기(任基)가 그 족손(族孫)인 나 임상원(任相元)에게 말하기를, “선군(先君)의 훌륭하신 모습이 이미 멀어졌는데 아직도 가장(家狀)을 짓지 않았으니, 이는 불초(不肖)의 죄이다. 이제 예전에 간직해 온 고신(告身, 직첩(職牒))을 근거하고 집안 노인(老人)들이 전하는 말을 참고하면 그 열가지에서 너댓은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그 장소(章疏) 1권(卷)을 가져다가 공이 벼슬살이한 연월(年月)을 기록하고 인하여 그 세계(世系)와 자손(子孫)들을 서술하여 차례에 따라 쓴다. 우리 임씨(任氏)는 풍천(豐川)의 대성(大姓)으로, 시조(始祖)는 임주(任澍)인데 고려에 벼슬하여 어사(御史)를 지냈고, 그로부터 3대를 전하여 임구(任球)가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으며, 그로부터 3대를 전하여 임제(任濟)는 성균 생원(成均生員)이었다. 그의 아들은 임명필(任明弼)이고 남부 참봉(南部參奉)을 지냈는데, 이 분이 곧 공의 고조(高祖)이다. 그의 아들은 임윤(任尹)인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황주 목사(黃州牧使)를 지냈고, 그의 아들은 임정로(任廷老)인데 자산 군수(慈山郡守)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은 임홍정(任弘正)인데 상상(上庠, 성균관)에 올랐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선고(先考)이다. 참지공(參知公, 임구(任球))으로부터 공에 이르기까지 모두 맏아들로서 집안의 적통(嫡統)을 전승(傳承)하여 마침내 우리 임씨의 대종(大宗)이 되었다. 공의 선비(先妣)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이상(貳相, 찬성(贊成)) 박호원(朴好元)의 딸이다. 공은 20세 때에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27세 때에 명경과(明經科)에 발탁되어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에 뽑혀 들어갔다. 신해년(辛亥年, 1611년 광해군 3년)에 조모(祖母)인 이씨(李氏)의 상(喪)을 당하였고
복제(服制)가 끝나자 박사(博士)에 승진하였다. 이어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옮기어 병조 정랑(兵曹正郎)으로 전임(轉任)되었다가 외임(外任)으로 나가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지냈다. 얼마 뒤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여 마침내 지산(智山, 지리산)의 아래에 있는 섬강(蟾江, 섬진강) 가에 전답을 사고 집을 지어 은퇴할 곳을 장만하였다. 그 무렵에 공의 종부(從父)인 판서(判書) 취정공(就正公, 임취정(任就正))이 신분이 귀해지고 또 권세도 있어서 그를 의지하여 벼슬에 나아갈 수가 있었는데도 공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취를 감추고 북쪽의 서울로 돌아갈 뜻이 없자, 판서가 누차 공을 나무랐으나 공은 끝내 고념(顧念)하지 않았다. 이윽고 정사(靖社, 인조 반정을 이름) 초에 이르러 남에게 아첨하고 빌붙은 여러 사람들이 대부분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공은 아무런 박해를 당하지 않고 환하게 빛났다. 공은 이미 호산(湖山)의 맑고 그윽함과 전답이 기름지고 비옥함을 즐거워하여 마침내 광양(光陽) 땅에 돌아가신 부모를 이장(移葬)하였다. 그로 인하여 거기에 살려고 하였으나 공은 나이가 늙고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남쪽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으므로 매양 그 점을 슬프게 사모(思慕)하고 그 실책(失策)을 뉘우치곤 하였다. 신유년(辛酉年, 1621년 광해군 13년)에 경상 도사(慶尙都事)가 되었고 장릉(長陵, 인조)의 초정(初政)에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에 제수되었는데, 공은 담박 하고 차분한 태도로 소박하게 처신하고 세속적인 명예를 희구(希求)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끝내 크게 현달(顯達)하지 못하였고 벼슬을 지낸 자취도 외직(外職)이 많고 내직(內職)은 적었다. 이로부터 공주(公州)ㆍ성주(星州)ㆍ청풍(淸風)ㆍ광산(光山)ㆍ충원(忠原)ㆍ갑산(甲山)ㆍ종성(鍾城)ㆍ능주(綾州) 등의 수령(守令)을 역임하였는데, 종성 부사로 부임할 때에는 구차(久次)로써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자계(資階)에 승진하였으나 외직으로 나간 것이었다. 내직으로는 제용감(濟用監)ㆍ종부시(宗簿寺)ㆍ군기시(軍器寺)ㆍ군자감(軍資監)ㆍ사복시(司僕寺) 등의 장관(長官)을 지냈고 성균관(成均館)의 직강(直講)ㆍ사예(司藝)ㆍ사성(司成)과 춘방(春坊,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필선(弼善)과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ㆍ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역임하였는데, 사헌부의 장령을 지낸 것이 특히 여러 차례였다. 공이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명성(名聲)이 나기를 바라지 않았고, 갑산과 능주에 재임할 때에는 모두 편의(便宜)에 관한 일을 논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해주었으며, 사간원의 정언으로 재임할 때에는 대관(臺官)이 김상헌(金尙憲)공을 파출(罷黜)하도록 요청하였는데 공은 단지 김공(金公)이 호당(好黨)하는 것만을 논척(論斥)하고 대관의 논의를 따르지 않았으며, 또 정온(鄭蘊)공을 죄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으니, 공은 대체로 그의 지기(志氣)를 홀로 실천한 까닭이었다. 늦게 서야 은대(銀臺, 승정원)에 들어가서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전임(轉任)되었다가 노병(老病)을 이유로 면직(免職)을 청하였으며, 병술년(丙戌年, 1646년 인조 24년) 12월 15일에 주자동(鑄字洞)의 옛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춘추(春秋)는 63세였다. 공의 배필(配匹)은 충청 감사(忠淸監司)를 지낸 윤경립(尹敬立)공의 딸인데, 공보다 4년 뒤에 세상을 떠났으며, 광주(廣州)에 있는 선영(先塋) 곁에 합장(合葬)하였다. 족자(族子)인 임기(任基)를 데려다가 후사(後嗣)를 삼았는데, 임기가 다시 아들이 없어서 형의 아들 임명원(任命元)으로 후사를 이었고, 딸은 다섯을 두었다. 측실(側室)이 낳은 아들은 임숙(任璹)이고, 다섯 딸들은 참판(參判) 권두경(權斗慶), 유철(兪), 판관(判官) 이석명(李錫命), 이진하(李震夏), 참봉(參奉) 심서규(沈瑞圭)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시흥(李始興)ㆍ이정흥(李鼎興)ㆍ이윤흥(李允興)ㆍ이익흥(李益興)과 조계(趙)ㆍ양성(梁晟)에게 시집간 딸은 셋째 사위 이석명의 소생이고, 이준(李畯)ㆍ이비(李)ㆍ이항(李)ㆍ이인(李疄)과 이중휘(李重徽)에게 시집간 딸은 넷째 사위인 이진하의 소생이고, 노세태(盧世泰)ㆍ유치상(柳致祥)ㆍ정유점(鄭維漸)ㆍ홍영(洪泳)에게 시집간 딸들은 공의 양자인 임기(任基)의 소생이다. 공의 측실 소생인 임숙(任璹)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남은 임도원(任道元)이고 나머지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선비가 세상에 이름을 내려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네. 공은 그것을 일찍 해내었으니 공경(公卿)에도 오를 수 있었네. 요로(要路)가 앞에 있으면서 용허(容許)하고 이끌었는데도 나아가지 않았네. 시대가 변하고 조정이 다시 새로워지니 마침내 뉘우칠 일이 없었네. 아홉 번이나 고을을 맡아 다스리고 여러 시(寺)에서 장관(長官)을 역임하였네. 미원(薇垣, 사간원)과 백부(栢府, 사헌부)에서도 이미 여러 번 능력을 시험하였네. 노년에 중서(中書, 의정부)에 들어갔으나 병이 들어 일을 해낼 수가 없었네. 벼슬살이는 비록 우졸(愚拙)하였지만 그 지기(志氣)는 부끄러울 것이 없었네. 후사가 재차 끊기었다가 재차 이어짐으로써 우리 종통(宗統)을 구하였네. 이에 공의 덕과 훌륭함을 기술하여 그 무덤 앞에 드러내어 알리네

출처 : 국조인물고 권25 명류(名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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