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관리
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16-07-17 (일) 20:19
ㆍ추천: 0  ㆍ조회: 621       
ㆍIP: 113.xxx.62
임효달 묘갈문 전문 [任孝達墓碣文全文]
 임효달 묘갈문 전문 [任孝達墓碣文全文]

朝鮮國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任公墓碣銘幷序

公捐館之三十八年嗣子基謂其族孫相元曰先君之耿光旣遠家狀且缺是不肖之罪也今欲据舊藏告身參以家老所傳庶可得其十之四五乎元遂取其章䟽一卷志其歷宦年月因以述世系錄子孫詳次而序之吾任豊川大姓始祖諱澍任高麗爲御史三傳而諱球入我 朝官參知政事四傳而諱濟成均生員子曰諱明弼南部參奉是爲公高祖子曰諱尹文科黃州牧使子曰諱廷老慈山郡守子曰諱弘正登上庠而早世是公考也自參知公至公皆以長嫡相傳遂爲吾任大宗妣密陽朴氏二相好元之女也公諱孝達字述之二十登司馬二十七摺明經第選入槐院辛亥遭祖母李氏喪服闋升博士遷憲府監察轉郞兵曹出守淸道旣而丁內艱遂就智山之下蟾江之上買田築室以爲菟裘當是時公之從父判書就正公貴且有權可以拔援以進而公遠跡領表無意北還判書屢以誚公而公竟不顧逮靖 社初諸謟附者率被瑕謫公則皭然矣然公旣樂湖山之淸邃田疇之沃衍遂遷厝父母於光陽地欲因而家焉公老無子不得南歸每爲悲慕而悔其失矣辛酉慶尙都事 長陵初政除掌樂僉正公恬靜拙素不肯希世故終不大顯其宦蹟多外而少內自是歷宰公州星州淸風光山忠原甲山鍾城綾州其守鍾城以久次進通政而出焉內則歷濟用宗簿軍器軍資司僕諸寺長成均直講司藝司成春坊弼善通禮院相禮憲府掌令諫院正言其爲掌令尤屢矣公爲郡不求名聲在甲山綾州並論便宜事以利民及爲正言臺官請黜金公尙憲公只斥金公之好黨而不從其論且言鄭公薀不可罪公盖獨行其志矣晩入銀臺爲同副承旨轉右副以老病乞免丙戌十二月十五日易簀于鑄字洞之舊第春秋六十三配忠淸監司尹公敬立之女後公四年而卒合窆于廣州先塋側寅坐申向之原取族子基爲嗣基復無子以兄子命元繼之女五人側室子璹女權升慶參判兪㯙李錫命判官李震夏沈瑞圭其直長始興鼎興允興益興女趙□梁晟爲錫命出畯毗㽘疄女朴重徽爲震夏出瑞圭養胤元爲子女盧世泰鄭維漸柳致相洪泳爲基出璹有四子長道元餘幼不盡錄銘曰


士之拔身科目爲榮公早得之可公可卿要路在前容與不進遭際更新汔無悔吝九佩郡符歷長諸寺薇垣柏府亦旣屢試老入中書病不任事宦則雖拙不媿其志再絶再紹以永吾宗詳德述美謹表其封


族孫嘉善大夫前行承政院都承旨 相元 謹譔
嘉義大夫行龍驤衛副護軍 尹深 書
癸亥六月 日立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겸(兼)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 임공(任公)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

공이 돌아가신 지 38년만에 장자(長子) 기(基)가 그의 족손(族孫) 상원(相元)에게 이르기를 “선군(先君)의 성대한 덕이 이미 멀어지고, 가장(家狀)도 이지러졌으니, 이는 불초(不肖)의 잘못입니다. 이제 구장(舊藏)과 고신(告身)에 의거하고, 가로(家老)들께서 전하시는 것을 참고하여 행여 열에 넷이나 다섯이라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하였다. 내가 마침내 그 장소(章疏) 한 권을 취하여 그 역임한 벼슬의 연월을 기록하고, 인하여 세계(世系)를 기술하고, 자손을 기록하여 자세히 차서(次序)하여 쓰노라. 우리 임씨는 풍천(豊川)의 대성(大姓)이다. 시조 휘 주(澍)는 고려조에 벼슬하여 어사(御史)가 되었다. 삼전(三傳)하여 휘 구(球)는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였고, 사전(四傳)하여 휘 제(濟)는 성균생원(成均生員)이었다. 제의 아들 휘 명필(明弼)은 남부참봉(南部參奉)이었는데 이 분이 공의 고조가 된다. 아들 휘 윤(尹)은 문과 급제하여 황주목사를 지냈고, 아들 휘 정로(廷老)는 자산군수(慈山郡守)를 지냈으며, 아들 휘 홍정(弘正)은 상상(上庠)에 올랐으나 일찍 죽었는데, 이 분이 공의 아버지이다. 참지공(參知公)으로부터 공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적장자(嫡長子)로 서로 전하여 마침내 우리 임씨가 대족(大族)이 되었다.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이상(二相) 호원(好元)의 딸이다. 공의 휘는 효달(孝達)이며, 자는 술지(述之)이다.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올랐고 27세에 명경과(明經科)에 발탁되어 괴원(槐院)에 뽑혀 들어갔다. 신해년(광해군 4, 1611년)에 조모 이씨 상을 당하였다. 복(服)을 마치고 박사(博士)에 올랐다.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옮겼으며, 병조랑(兵曹郞)으로 옮겼다가 청도군수(淸道郡守)로 나갔다. 이윽고 어머니 상을 당하여 마침내 지산(智山)의 아래 섬강(蟾江)가로 나아가 전답을 사고 집을 지어 토구를 삼았다. 이때를 당하여 공의 종부(從父) 판서 취정공(就正公)이 귀하고 권세가 있어서 의뢰하여 나아갈 수 있었는데, 공은 종적(蹤跡)을 멀리 영남에 두고 북쪽으로 돌아올 뜻이 없었다. 판서가 누차 공을 꾸짖었으나 공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정사년(광해군 10, 1617년) 초에 미쳐 모든 아첨하고 아부하던 자들이 대부분 과실로 견책 당했으나, 공은 깨끗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미 호수와 산의 맑고 깊음과 토지의 비옥하고 평안함을 즐거워하여 마침내 부모를 광양(光陽)의 땅에 옮겨 모시고 그대로 살고자 하였다. 공은 늙도록 자식이 없어 남쪽으로 돌아가지 못하자 늘 슬픈 생각을 하며 자신의 실수를 후회하였다. 신유년에 경상도사(慶尙都事)가 되었고, 장릉(長陵, 仁祖, 1623~1649년)이 처음 정사(政事) 할 때에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에 제수되었다. 공은 평온하고 조용하며 소박하여 세상에 아부하여 즐겨 시속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끝내 크게 드러나지 못하여 그가 벼슬한 것은 외직이 많고 내직은 적었다. 이로부터 공주(公州), 성주(星州), 청풍(淸風), 광산(光山), 충원(忠原), 갑산(甲山), 종성(鍾城), 능주(綾州)를 맡아 다스렸다. 종성군수로 오래 있다가 통정(通政)에 올랐으나 다시 외직으로 나갔다. 내직으로는 제용(濟用), 종부(宗簿), 군기(軍器), 군자(軍資), 사복(司僕) 등 여러 시(寺)의 장(長)과 성균관(成均館)의 직강(直講), 사예(司藝), 사성(司成)과 춘방(春坊)의 필선(弼善)과 통례원(通禮院)의 상례(相禮)와 사헌부의 장령(掌令)과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그 중에 사헌부 장령이 된 것이 더욱 많았다. 공은 군을 다스림에 명성을 바라지 않았다. 갑산과 능주에 있을 때에는 편리하고 마땅한 것을 함께 논하여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을 일삼았다. 정언이 되었을 때에 대관(臺官)이 김상헌(金尙憲)을 내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공은 다만 김공이 당(黨)을 좋아하는 것만을 배척하고 그 의논을 따르지 않았다. 또 정온의 죄를 주어서는 부가함을 말하여 공만이 홀로 그 뜻을 실행하였다. 만년에 은대(銀臺)에 들어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우부승지로 옮겼다가 노병 때문에 면직을 청하였다. 병술년(인조 24, 1646년) 2월 15일에 주자동(鑄字洞)의 옛 집에서 돌아가셨으니, 춘추 63세이시다. 부인은 충청감사 윤경립(尹敬立)의 딸이다. 공보다 4년 뒤에 돌아가시니, 광주(廣州)의 선영 옆에 인좌신향(寅坐申向)의 언덕에 합장하였다. 족자(族子) 기(基)를 양자를 삼았는데, 기가 또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 명원(命元)을 양자하였다. 딸이 다섯이며, 측실(側室)의 아들은 숙(璹)이다. 딸은 권승경(權升慶), 참판(參判) 유(兪□), 판관(判官) 이석명(李錫命), 직장(直長) 이진하(李震夏), 직장 심서규(沈瑞圭)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시흥(始興), 정흥(鼎興), 윤흥(允興), 익흥(益興)과 조계, 양성(梁晟)에게 각각 출가한 딸은 진하의 소출이며, 서규는 윤원(胤元)을 양자하였다. 노세태(盧世泰), 정유점(鄭維漸), 유치상(柳致相), 홍영(洪泳)에 각각 출가한 딸은 기의 소출이다. 숙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맏이는 도원(道元)이고, 나머지는 어려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선비가 발신(拔身)함은 과거(科擧)로 영화를 삼네.
공은 일찍 급제하여 공경(公卿)이 될 수 있었도다.
요직이 앞에 있어도 혹 나가지 않았다네.
좋은 때를 만나 다시 새로워짐에
거의 조그만 과실도 없었도다.
아홉 번 군을 다스리고
여러 시의 장을 역임하였다네.
미원(薇垣), 백부(柏府)에서도
이미 여러 번 벼슬하였다네.
노년에 중서(中書)에 들어갔으나,
병으로 일을 맡지 못하였도다.
벼슬은 비록 낮았으나 그 뜻만은 부끄럽지 않았도다.
후사가 두 번 끊어지고 두 번 이어져서
우리 종중(宗中)을 영원토록 하였도다.
덕의 아름다움을 상세히 기술하고
삼가 그 묘에 표하노라.


족손(族孫) 가선대부(嘉善大夫) 전 행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 상원(相元)이 삼가 글을 짓고, 가의대부(嘉義大夫) 행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 윤심(尹深)이 글씨를 쓰다.


계해년 6월 일에 세우다.







   
  0
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