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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16-07-17 (일)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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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善大夫行都承旨任公行狀. ( 만휴공 有後)
嘉善大夫行都承旨任公行狀.
                                                                                                                   黃敬源著江漢集

 先生의 諱는 有後, 字는 孝伯 號를 萬休堂 또는 休窩라 하였다. 豊川은 그 貫籍으로 判書國老와 校理 守正은 先生의 祖父兩世이며,母夫人은 牛峰金氏이니 節度使 禹瑞는 곧 外祖이다.
宣祖34年(1601) 11月3에 서울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모부인 金氏가품에 안고 漢詩를 들려주면 듣는 대로 곧 외우곤 하였다. 6세에 父親을잃었고 7세에 향숙(鄕塾)에 가서 글을 배웠는데 8세에는 1년 동안에 史略 한 질(秩) 다 통하고, 다시 掌令 李推達에게 배우던 바 掌令이 크게 탄복(歎服)하여 말하기를, “네 재주가 절륜(絶倫)하여 내가 스승이 될 수 없다. 다시 명사(名師)를 찾도록 하라” 고 하여 , 드디어 三宗兄 소암(疎(庵) 叔英에게로 가서 배우게 되었다.
疎庵이 시험 삼아 과체 시(科體詩)를 지어보게 하고는 역시 크게 놀래고 처음에는 詩짓는 법을 가르쳤고, 다시 莊子, 史記, 漢書등을 익히도록 하였는데, 法輪寺로 들어가서 1年 남짓하게 과독(課讀)하고 나서부터 先生의 文學은 江河를 타놓은 듯이 갑자기 크게 진전하였던 것이다. 이에 앞서 부친과 親交가 있던 許筠에게도 배운 적이 있는데 어느 날 그 집에 갔다가 그가 어떤 친한 손과 수작하는 말이 극히 ?慢함을 보고 13세의 나이로 이를 비루하게 느껴 이로부터 발자취를 끓고 다시 가지 않고는 곧 疎 庵에게로 간 것이다.
18세에 庭試에 응시하여 合格하게 된 것을 考官이 끝 귀에 험이 있다하여 떨어트렸고, 24세에 生員 進士 兩試에 모두 合格하였는데 進士 試에는 壯元까지도 ? 望되었으나 필경 第 二人으로 되어 時論이 이를 애석해 하였다.
2년 뒤 庭試에서도 역시 第2위인 乙科 第1人으로 급제하여 承文院을 거처 다음해丁卯胡亂에 假注書로 임금을 호위하여 江華로 갖는데, 淸에서 劉興祚를 시켜 和親을 청하여 왔고 조정에서 講和하자는 논의가 대두되자 선생은 분연히 일어나 절대로 강화해서 안 된다는 疏를 두 번이나 올려 반대하였다. 이때는 仁祖가 反正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外敵의 侵犯도 있고 해서 勳臣들이 光海의 舊臣에 대한 의혹이 깊어가고 있는 터이라 그들의 반란을 꾀하는 기밀을 고발토록 하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때 마침 先生에게는광질(狂疾)에 걸린 아우 之後가 있어 그 鄕里사람들과 은밀히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가 도리어 이를 고발하였다.
고발당한 사람들이 격분한 나머지 先生의 叔父 判書就正도 함께 가담한바 있다고 ? 告하여 判書의 父子 三人이 모두 杖死되고 先生도 連累者로 구속되었으나 협의가 없음이 밝혀져 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한집의 친속이 서로 禍를 입힌 것을 傷痛한 나머지 之後와 絶義하는 글을 지어 先墓에 告하고 終身토록 그 아우의 얼굴을 대하지 않았다.
집안과 先生의 處地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자 마침내 멀리 東海를 따라 내려가 蔚珍 酒泉坮로 들어가서 숨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은 山水가 수려한 곳이기도 하여 여기서 一生을 마칠 생각으로 精舍를 짓고 분전(墳典)을 연구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수업을 청하게 되었고 先生은 이들을 지도 권장하여 궁벽하고 질박하기만 했던 이 고장에 마침내 文風을 일으켜서 田九 ? 朱必大등 여러 사람이 혹은 進士에 올랐고 혹은 大科에 及第하였으니 이들은 모두가 先生의 弟子이다.
31세에 成均館典籍과 巨昌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다음해居山都察訪으로 부임하였으나 석 달이 안 되어 버리고 돌아가고, 2年 뒤 36세(1636)에 居山都察訪이 되었으나 한 달이 안 되어 역시 버리고 돌아갔다.
이해 겨울에 이른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仁祖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고 이어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고, 곧 달려가려고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자 倡義使 李顯英과 지원군 300여명을 인솔하고
달려가던 도중에 原州에 이르러 강화가 체결된 사실을 듣고는 시골로 돌아갔다.
2년 뒤 江原道都事에, 2년 뒤 다시 禮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45세(1645)에 慶尙道都事로 부임하였다가 그해에 병으로 사퇴하고 말았다.
49세에 울진에서 母夫人의 喪事를 당하여 廣州故山으로 귀장(歸葬)하였는데 葬禮를 지내고도 오직 솔잎과 상수리를 먹었고 혹은 미음으로 겨우 연명하고, 소채나 염장(鹽醬)등속도 입에 대지 않았으며, 묘소 결에서 3년간 待墓하며 조석으로 참배 하였다. 부친이 돌아갔을 때 너무 어려워서 服을 입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는지라, 모부인 의 喪期를 마친 뒤에 다시 素食하면서 心喪 三年을 마치니 전후 6年동안 그 수척한 모습과 哀慕하는 정상에 친척과 향리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은 자가 없었음은 물론이려니와, 그런 모습 그런 기운으로 능히 지탱해 낸 것을 도리어 괴이하게 여겼다.
복을 벗은 뒤에 永川. 永川와 仁同府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거나 병을 핑계로 모두 나가지 않았다.
孝宗 4年(1653)에 白江 李敬輿가 ? 子를 올려 先生의 지극한 孝行과 뛰어난 文學, 그리고 경양의덕을 말하면서 마땅히 待從之列에 두어야 한다고 천거하고, 다시 入對한 자리에서 극력 추천하여, 孝宗은 吏曹에 명을 내려 곧 成均館司藝. 掌樂院正. 司憲府掌令등에 임명 되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해 11월에 다시 左通禮를 거처 寧海府使로 나가서는 의혹의 송사를 정지 시키고 豪族을 누르며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어 백성들이 감복하고 기뻐하였으나, 御史를 미리 나와 기다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3年 뒤에 司導寺正을 거처 55세에 江陵府使를 역임하였고, 다음해(1656)鍾城府使가 되어 通政階로 승진하여 堂上官이 되었다. 鍾城은 咸鏡道 북단에 위치하여 오랑캐의 땅과 인접한 곳이다.
先生이 부임하면서 豆滿江 沿岸의 방비를 철저히 하여 임의로 출입하는 자를 막도록 하고, 백성과의 약속을 엄히 하여 만일 오랑캐의 땅으
로 도망하려는 자가 있으면, 즉시 잡아 베게하고, 受降樓와 逍?堂을 세우는 등 무너져가는 관사까지도 일신하게 수리 또는 건립하였으며, 종래 本府의 常貢으로 되어 있던 (? 皮. )등 백성의 힘으로는 갖추기 어려운 것들을 관에서 自據하여 이웃 고을에서 구입해 貢納,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學堂을 수리하고 儒風을 진작시켜, 그곳 풍속이 一變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孝宗이 昇遐함을 듣고 ? 山이 이루어질 때 가지 여러 달을 素食하고 肉脯등속도 입에 대지 않았다.
60세가 되던 顯宗 원년에 禮曹參議를 거쳐 潭陽府使가 되어서는 단신으로 부임하였는데, 때 마침 큰 흉년이 들었다. 이에 미리 준비했던 양곡을 가지고 일정한 규칙에 의한 ? 政을 시행하여 외방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萬여명의 ? 民까지도 온전히 구제하였다.
御史가 이 사실을 보고하여 嘉善으로의 승진을 명하였으나, 臺諫들이 遇? 하다고 爭執하는 바람에 정침되고 말았다.
그 뒤에 자그마한 일로 監司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어 돌아오니, 백성들은 碑를 세워 그 공적을 칭송했다. 이때 전염병을 피해 先生에게 와 있던 누이가 죽었다는 데, 先生은 장예에 필요한 모든(棺?)등 일체를 갖추어 장사지내주고, 또한 5개월 동안 素食하였다. 그 뒤에 두 번이나 承旨로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淸의 역관(譯官) 李一善이란 자가 함부로 ? 慾과 暴? 한 행동을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일산(藎)을 버리고 말을 타고 대궐에 들어오는 등, 방종하기가 짝이 없었는데도 아무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어서 온 국민이 분개하고 있었는데 先生이 疎를 올려, “李一善은 본시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 되어 간 자에 불과한데 한낱 譯活로서 거만함이 이와 같으니, 淸에 주청하여 그 죄를 다스리도록 하자” 고 청하기도 하였다.
67세에 淸風府使로 부임 한 바 이해도 흉년이 들어서 行政을 潭陽과 같이 하여 ? 死者가 없었다.
監司가 先生에게 진정(賑政)에 쓰인 양곡이 얼마나 되느냐? 고 물었으나 말하지 않자, 더욱 그 겸양함에 감복하였고, 이 사실을 보고 받은 顯宗은 특별히 嘉善階로 올렸다.
淸風 在任 中에는 詩祚도 많이 남겼다.
71세에 工曹判書에 이어 兵曹判書를 거쳐 都承旨가 되었다가 병으로 사면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儒學의 宿望으로 先生을 大司成또는 大司諫사간에 注據하기도 하였으나 시기하는 臺諫이 있어 지난날의 家難을 꼬집어 탄핵하자, 副提學 李敏迪이 ?자를 올려 변명한 나머지 臺諫이 ? 職되기도 하였다.
72세(1671)에 京畿道監司가 되었다. 이때 관내의 守令이 죄를 지어 장형(杖刑)에 처할 자가 있었는데, 마침 사명(赦命)이 있어 면한 것을 마치 先生이 늦추어 주어서 赦命을 기다리게 하였다고 어느 정승이 선생을 下獄을 청하여, 弘文館에서 ?자로 그 억울함을 해명하였다.
가을에 戶曹判書를 거쳐 慶州府尹으로 나갔다. 先生은 年老하다 하여 조금도 怠慢함이 없이 아랫사람을 엄중히 단속하고 백성에게는 友愛를 베풀었으며, 剖決또한 神明하여 訟案이 留? 하는 일이 전혀 없어서 온 府中이 크게 다스려졌다. 그러나 6월 親忌에 지나친 곡읍(哭泣)으로 기운이 탈진된 되다가 宿疾이 크게 發作되어 享年73세로 任所에서 세상을 떠났다.
廣州故山으로 歸葬하였는데 그 뒤 1975年 天安郡 笠場面 待壯里山 二 乙坐에 移葬하였으며 大提學 黃景源이 지은 神道碑 가 있다.
先生이 卒한지 얼마 뒤에 蔚珍 선비들이 先生이 즐겨 살았던 酒泉坮 孤山祠란 書院을 세워 제사 하였고, 다시 몇 십 년 뒤에 先生의 卓월한 孝行으로 정여(旌閭)와 함께 吏曹判書에 追贈되었으며, 正祖 5年에 이르러 貞僖公이란 謚號가 내렸다.
부인은 安東金氏 三傑의 女인데 아들이 없어서 仲兄인 汝後의 아들 翊登으로 뒤를 이었으며 李壽俊 .許 采 .姜再烈. 柳 倡. 趙泰果. 南泰有는 그 사위다.
先生은 깊은 學問의 充養으로 論議하고 接人함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誠?로 待하고 괴벽함이 없었으며 일반적으로 行政事務에 疎略한 것이 文인들의 常例인데 先生은 勤實과 評密을 다하여 細務까지도 잘 다스렸는지라 가는 곳마다 去思碑가 세워졌다. 자신을 법조로 엄히 檢束함과 奉先에 쏟는 그 정성은 옛 獨行者도 쉽사리 미치지 못할 바 있었으니, 집안에 한 섬의 양곡이 없는데도 제사에 임하면 비록 밭가는 소, 기르는 말까지도 아낌없이 팔아서 풍결(豊潔) 을 다하였고 忌日에는 한 알의 쌀도 입에 넣지 않고 그 날을 마쳤다. 上疏할대는 언제나 朝衣를 입고 齋戒하듯 ? 然한 모습으로 올리고는 批答이 내려진 뒤에야 비로소 朝服을 벗었으며, 孝宗의 國喪을 당하여서는 이내 年老한 터인데도 方喪하는 동안 무릇 8개월을 脯 한 조각도 입에 넣지 않았다.
거처하는 곳은 날마다 깨끗이 소제하고 ? 然히 端坐하고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문장은 전아경건(典雅勁健)하여 西漢의 風調가 있고, 詩만를 남겼으며, 만년에는 더욱 周易을 좋아하여 남다른 造 誌가 있었다. 著述로는 萬休堂集 十一권 四책이 간행된 바 있으며, 우리나라 역사를 기술한 筆原告本 休窩雜纂 三책이 延世大學校 圖書館에 보관되어 있다.
졸고 있는 기러기를 그린 병풍그림을 읊은 詩 ( ? 障子) 에 한 폭의 비단위에 졸고 있는 기러기를 누가 옮겼나요, 갈대 꽃 위에 서리 내리고, 연기 낀 달빛 아래 소상 강을 꿈꾸고 있느냐? 하였는데, 이 詩는 일찍이 日本까지 흘러 들어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膾? 되었다 한다.
國文學作品도 남긴 것이 있으니, 종성 부사로 있을 때 중형 汝後의 回甲잔치에 참석하지 못함을 한탄하여 時調를 지어 보내면서 이를 壽宴에서 부르도록 하였다.
기러기 날아드니 소식을 뉘 전하리. 萬里邊城에 달빛만 벗을 삼아, 수항루 三更破却에 잠 못 일 워하노라.
이밖에 牧童歌라는 長篇歌詞가 있는데, 이것은 先生이 蔚珍에 있을 때, 아침에 소먹이는 아이가 소를 놓아먹이는 것을 보고는 先生이 입으로 부르고 손녀로 하여금 쓰게 한 것이라고 적혀있다. 그 내용인 즉, 一三二句에 달하는 장편으로 처음에는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하고 다음에는 聖人의 道를 배워서 功名을 세워야 한다는 뜻을 말하였다. 이상은 작자가 목동에게 이르는 말로 되어 있고, 이하는 목동의 대답으로서 부질없이 세상의 공명을 꿈꾸다가 禍를 당하느니 보다는, 버드나무 그늘에서 한가롭게 휴식하는 저 소와 같이 부귀공명을 헌 신작처럼 생각나는 우리의 생활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하며, 약대 인물들의 평탄치 못한 생애를 낱낱이 열거한 가사이다. 이에 대하여는 明知大學論文集 제 一集 가운데에 李相寶의 [任有後의 牧童歌]라는 논문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任相元著恬幹集 : 嘉善大夫行都承旨任公行狀.黃敬源著江漢集. 任公神道碑銘]

                   族後孫 任昌宰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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