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관리
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16-07-17 (일) 21:07
ㆍ추천: 0  ㆍ조회: 695       
ㆍIP: 113.xxx.62
萬休堂任公諱有後遺蹟碑 (울진 주천대)
                                                  
                                                            萬休堂任公諱有後遺蹟碑

  蔚珍郡 近南面 杏谷里 酒泉臺臺上

선생은 우리 문학사상(文學思想) 혜성(彗星)과 같은 存在이다. 先生은 豊川任氏 諱는 有後 字는 孝伯 萬休는 그의 堂號다.
일찍 족형(族兄) 소암선생(疎菴先生) 叔英에게 受學하여 청려기경(淸麗奇警)한 詩詞와 전아웅혼(典雅雄渾)文章은 그의 作品이 나올적마다 世人을 놀라게 하였다.
先生은 早年에 文科에 及第하여 文臣으로 出世할 터전을 닦았으나 바로 仁祖反正의
大政燮이 일어나고 뜻밖의 가화(家禍)를 당하여 세상에 뜻을 끓고 어머니를 모시고 벽지(僻地)의 은둔처(隱遁處)를 찾다가 東海岸의 奇絶한 泉石을 사랑하여 마침내 이곳 蔚珍郡 近南面 杏谷里에 이유(移寓) 하였으니 이때는 곧 西紀一六二八年 先生이 二十八歲 되던 해다 .
定往後에는 地方人士들과 後進 敎育에 힘을 기울인 결과 이때까지 文化的으로 뒤떨어졌던 이 고장에서 많은 學士들이 前後하여 生員試에 及第하고 계속하여 後排가 뒤를 이어 비로소 文學界의 파천황(破天荒)을 이루었다. 先生의 영향은 사람에게 뿐 아니라 自然界에 까지 그 빛을 남겼다.
부근의 명승왕경(名勝往境)으로 先生의 足跡이 닿은 곳 마다 모두 詩와 文으로 아로새겨 졌으니 해산랑유록(海山浪遊錄) 주천대기(酒泉臺記) 백사정기(白沙汀記) 가리암기(歌哩岩記) 용용범월기(龍宂泛月記) 등의 웅편걸작(雄篇傑作)을 낳았고 특히 수천대(水穿臺)를 주천대(酒泉臺) 산을 孤山 石壁을 蒼玉壁 바위를 舞鶴岩 등으로 命名하여 三百年이 지난 오늘날까지 詩人의 제영(題咏)과 觀光客의 遊賞의 對象으로 그 이름이 훤전(喧傳)되고 있으니 아아 이 땅에 남긴 先生의 偉大한 遺韻이여!
先生은 隱居生活中에도 國事를 잊지 못하여 丙子胡亂에는 義兵을 動員하였고 對淸講和를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한 지극한 孝行이 있었으므로 나라에서 그 卓越한 문학행의(文學行誼)를 인정하고 불러들여 中央에서는 掌樂院正 左通禮 禮曹參議 工兵戶曹參判都承旨와 外職으로 는 江陵府使 鍾城府使 淸風府使 京畿觀察使 등을 歷任하고 一六七三年에 慶州府尹으로 任所에서 仙逝하였다.
死後에 政府로부터 吏曹判書의 織과 貞僖公의 謚가 내렸다. 著作으로는 萬休堂集十一卷과 休窩雜簒 三卷이 있다.
先生은 官界에 나선 뒤로 오랜 동안 집을 蔚珍에 두었다가 四十九歲에 이곳을 떠났으나 뒤에도 이곳 후배들에게 편지로 詩로 연연한 心情을 실어 보냈다.
돌아가신 다음해인 一六七四年에 門人들이 先生의 舊趾에 孤山祠를 지어 제사를 올리다가 一七十五年에 孤山書院의 사액(賜額)을 받아 이곳과 인연 있는 東峯金時習 西陂吳道一과 合祀하였다.
一八六八年 書院 ?撤令에 의하여 書院이 헐리고 서원유허비(書院遺墟碑)의 表石만 있었는데 一九十四年 경지방사림(頃地方士林)들 이곳에 고산강당(孤山講堂)을 세워연학도장(硏學道場)으로 삼고 每年 舊曆 四月十五日에 定例詩會를 열어 年中行事로 삼아왔다.
다시 지난해에 이곳 儒林들이 先生 逝去 三百週年을 期하여 追慕하는 記念碑를 세울 것을 決議 推進하였다.
先生d,; 後孫宗彬이 그 先親 嘉淳氏의 遺志를 받들어 刻石의 經費를 獨담하고 立碑에 관한 一切物力은 現地儒林이 도맏아서 碑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蔚珍의 南孝重 田炳奎 兩氏 서울에 있는 先生의 後孫인 珌鎬昇彬 宗親會幹事 甲淳 등의 여러분이 始終일을 위하여 努力하였다.
諸氏로부터 碑文撰述의 命을 받고 삼가 그 遺蹟과 顯末을 엮어 永遠한 世代에 전하고자 한다.
一九七四 年 五月 日
旁後孫成均館大學校 敎授 昌淳 짓고 씀
(後孫 珌鎬 藏)
(後孫 成弼(赫)移記)



만휴당(萬休堂) 임유후(任有後)와 울진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 가면 "주천대"가 있다.

 이곳은 만휴당 임유후 선생이 울진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개화의 현장으로 본래는 "수천대(水泉臺)"였으나 만휴당의 제의로 "주천대(酒泉臺)"로 변하였다.
선생은(1600~1673) 풍천임씨로 諱(휘)는 만휴(萬休), 字는 효백(孝伯), 號(호)는 만휴당(萬休堂)이며 대대로 벼슬을 지낸 문반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고조부는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고 증조부와 조부는 "이조판서", 조부는 "영의정"에 추증된 명문가문 출신이다.
선생은 6세때 아버님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삼종형 소암(疎菴) 숙영(叔英)에게서 수학을 하였다. 선생은 어릴적부터 매우 영특하여 남들에게 신동이란 말을 자주 들었다고하며 26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정원과 춘추관에서 벼슬을 하면서 착실히 출세의 길을 달렸다.
이렇게 성장가도를 달리던 만휴당은 1628년 (인조6년), 동생 지후(之後)로 인하여 엄청난 사건을 겪게 된다. 만휴당의 동생 지후(之後)가 불순한 무리들과 어울려 모반을 꾀하다가 이를 도리어 고발하게 되자 고발당한 사람들이 격분하여 지후의 중부(仲父)인 예조판서 취정(就正)을 이에 가담하였다고 무고하여, 결국 이 사건으로 예조판서의 가정은 3부자가 모두 장형(杖刑)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엄청난 화(禍)를 입게 되었다.
다행히 만휴당은 혐의가 없음이 밝혀져 풀려나긴 하였으나 그는 벼슬길을 포기하고 야인으로 돌아가야 하는 큰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하고 동해를 끼고 낯선 길을 찾아 나섰다. 고향을 등지는 그의 심정이 얼마나 비통했는지 그의 동생에게 남긴 말 속에서 짐작할 수 있다,"슬프다 흉동(凶童)아, 너 내 동생이 아닌가? 선친이 돌아가실 때 너는 강보에 싸인 젖먹이였고 나와 두 형은 불과 7,8세 미만의 철부지로서 어찌 무사히 커서 대성하기를 바랄 수 있었겠는가? 오직 어머님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서로 의지하여 자라왔는데 너는 어찌하여 스스로 화를 만들어 우리 집을 이 지경이 되게 하고 조상을 욕되게 함이 이에 이르게 하였느냐. 너는 어릴 때 병이 많았는데 차라리 그 때 일찍 죽어버리지 아니하고 오늘 날 이 지경까지 만들었는고..." 하면서 동생을 탓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동해안을 두루 둘러보시다가 근남면 행곡리의 경치에 반하여 이곳에 우거하였는데 그때가 선생이 28세 되던 해이다.
선생은 울진에 정주하고 주천대에 올라 술을 즐기면서 마을 어른들과 흉금 없이 지내게 되었고 울진의 선비들과도 격이 없이 학문을 논함으로서 울진 사람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그는 울진에 정주하면서 후진양성에 최선을 다하여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한편 우매한 울진 지방민들에게 차원 높은 안목과 깊은 지식을 안겨주었다.
울진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반기를 들고 고려복벽운동을 벌임으로써 과거 등용문이 막힌 일이 있었고 선조의 왕위 찬탈 때 울진의 젊은이들이 관련되어 다시 단종복위 운동이 일어나게 되니 일부 해제되었던 과거 등용문이 또다시 봉쇄되고 말았다. 이러한 일로 한 나라 안에서도 감옥과 같은 지역적 차별을 당하게 되니 울진의 젊은이들은 아예 글 배우기를 포기하고 농사나 지으면서 술 한 잔으로 울분을 달래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만휴당 선생이 울진에 오게 되었는데 울진에 와서 지방의 현실을 바라보니, 아무런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 허송세월하는 젊은이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꾸준하게 학문을 연마토록 해야겠다는 의욕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쌓도록 권장하고 자신의 높은 지식을 전수하는 일에 매진하게 되니 자연히 울진 주민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수(數)명의 진사를 배출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한 농촌에서 일시적으로 많은 가계 부담이 됨을 보고 상호 부조(扶助)하여 협력하는 계(契)를 조직하여 대사를 부담 없이 치룰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울진인 들에게 새로운 학문과 의욕을 심어주던 선생은 평소의 애국충정이 조정의 인정을 받아 49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경기관찰사, 호조판서,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73세 때 경주부윤을 지내다 서거하였다.
선생께서 울진에 정주하는 동안 불영사 14비경, 고산15경. 격암선생유전, 주천대기 등 울진의 명승과 명사들에 대한 여러 편의 기록들을 남겼으며 목동과 문답하는 형식의 유명한 "목동가(牧童歌)"를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사후 이장(移葬)하는 과정에서 나온 유품 중 관복(官服)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관(棺)은 중앙대학교에 소장되고 있다고 한다. 그가 평소 주민들과 어울리며 후진을 양성하던 근남 행곡리 주천대에는 지금도 그의 유허비가 있다. 1674년 그의 제자들과 문인들이 고산사(孤山祠)를 짓고 선생을 모시고 배향하다 나중에 동봉(東峯) 김시습 선생과 서파(西坡) 오도일 선생을 함께 배향하면서 고산서원이 되었다.


                   [출처:울진군지. 萬休堂集. 향토사연구1집(1988) 2009.11 김성준]
   
  0
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