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관리
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16-07-13 (수)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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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14世 죽애공 (諱 說) 묘갈명
  국조인물고 발취
 
        
 
 
 
 

임열의 묘갈명(墓碣銘)                                   저자 이식 (李植)


국조인물고 권15 경재(卿宰)


 

 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죽애(竹崖) 임공(任公)이 문학과 숙덕(宿德)으로 네 왕조를 두루 섬겨 그 유풍과 여운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컫고 있다. 그리고 나 이식(李植)의 외할아버지 동리(東里) 윤옥(尹玉)공이 공과 막역(莫逆)의 벗이었는데, 비록 나이와 지위는 조금 차이가 나지마는 걸어온 길은 실로 일치하였기 때문에 내가 어려서부터 공의 명성과 행실에 대해 세상 사람들보다 더 깊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공의 외증손(外曾孫) 길주 목사(吉州牧使) 최유해(崔有海)군이 공의 종인(宗人)에게 물어 공의 유사(遺事)를 기록한 다음 나에게 글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여 장차 공의 묘소에 게시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내가 의리상 사양할 수 없는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열()이고 자는 군우(君遇)이다. 임씨는 본래 중국 사람이었는데, 고려 말엽에 임온(任溫)이란 분이 공주(公主)를 수행하는 관리로 동방에 왔다가 비로소 풍천부(
川府)에 적을 두고 살았다. 그 뒤에 대대로 유명한 분이 나왔는데, 대장군(大將軍) 임주(任澍), 서하 부원군(西河府院君) 임자송(任子松), 풍산군(山君) 임덕유(任德儒) 및 조선조 참지정사(參知政事) 임구(任球)가 가장 저명하였다. 임구의 아들 성균 생원(成均生員) 임복생(任復生)이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 교수(敎授) 임장손(任長孫)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 성균 생원 임제(任濟)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남부 참봉(南部參奉) 임명필(任明弼)은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는데, 모두 공이 귀하게 되어 받은 은총의 관례이다. 어머니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첨정(僉正) 윤훤(尹萱)의 딸인데, 정덕(正德) 경오년(庚午年, 1510년 중종 5) 2 2일에 공을 낳았다.

공이 가정(嘉靖) 신묘년(辛卯年, 1531년 중종 26)에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고, 계사년(癸巳年, 1533년 중종 28)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처음에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선발되었다가 추천을 받아 사관(史官)으로 들어갔다. 병신년(丙申年, 1536년 중종 31)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중시(重試)를 보아 제2등으로 합격하고 무술년(戊戌年, 1538년 중종 33)에 이조 좌랑(吏曹左郞)으로 발영시(拔英試)를 보아 제2등으로 합격하였는데, 6년 안에 세 번 대과에 합격한 사람은 우리 조선조에 없었으므로 문학의 명성이 혁혁하여 휴가를 받아 호당(湖堂)에서 독서하는 대열에 선발되었다. 삼사(三司)를 두루 거치고 직제학(直提學)으로 있다가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로 발탁되었고 대사간(大司諫)ㆍ이조 참의(吏曹參議)ㆍ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전직되었다.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가 조정으로 들어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ㆍ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또다시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가 침체된 것을 일으키고 나태한 백성을 근면하게 만들어 치적이 매우 드러나니, 조정에서 공의 능력에 감복하였다. 체차되어 돌아온 지 오래되지 않아 특별히 추천을 받아 재임(再任)하였다가 돌아와서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ㆍ우윤(右尹)을 역임하고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겸임하였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승진하여 도총관은 체차되기도 하고 겸임하기도 하는 등 30여 년간 한성부(漢城府)를 떠나지 않았다. 만력(萬曆)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 5 8일에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

공이 처음에 화려한 문장으로 벼슬을 하였으나 정성과 근면으로 직무를 보아 부임한 곳마다 명성이 났고 60년간 조정에 벼슬하면서 시종 한결같았다. 중간에 권간(權奸)이 빚은 사화(士禍)를 겪었으나 자신을 굽혀 따라간 적이 없었고 또한 과격하여 환난을 범하지 않았으므로 공론(公論)이 공을 중시한 지 오래되었다. 명종(明宗)ㆍ선조(宣祖) 두 조정에 이르러 사론(士論)이 일변하여 탁한 사람은 축출하고 청한 사람은 들추어내기에 힘쓰자, 옛날의 신하나 선배들이 탄핵이 두려워 피하려고 대부분 신진(新進) 사류들에게 가까이 빌붙어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고 현인을 예우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은 바람에 풍습이 돌변하였는데, 공은 두서너 벗들과 같이 차분하게 침묵을 지키고 오직 서사(書史)에다 취미를 붙여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비록 자주 비난을 들었으나 분수대로 진실하게 대하면서 안색이나 언어에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세상의 의논에 경시를 당하였다. 다만 사람을 공평하고 명확하게 평가하고 알아보았으므로 관학(館學)의 학도들이 높이 우러러 보았고, 조정에서도 공을 추대하여 앞자리를 양보하였기 때문에 누차 과거를 관장하였으며, 선발된 사람들이 모두 유명하고 특출하여 인재를 얻은 바가 가장 성대하다고 일컬어졌다. 율곡(栗谷) 선생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있을 때 항상 개탄하며 말하기를, “저 임 아무개는 또한 무슨 잘못이 있기에 오래도록 채용되지 않는단 말인가?” 하고 이내 정경(正卿)으로 추천하였는데, 이때부터 거듭 시론(時論)에 거슬리었다. 이윽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되었다가 탄핵을 받아 임명되지 않았으니, 이는 율곡이 빌미가 된 것이다
.

공은 집에서 생활할 때 규범이 있었고 어버이를 정성으로 섬겨 조석으로 반드시 몸소 부인과 같이 밥상을 올렸으며, 어버이가 돌아가자 과부가 된 누님을 매우 공경스럽게 섬기어 조정에서 물러나오면 반드시 그의 집을 찾아가 안부를 살피었다. 선대의 가산이 풍족하였고 부인이 이를 경영하여 줄어들지 않았는데, 공이 가산이 불어나는 것을 혐오하여 유무를 물어보지 않았고 평생 동안 사사로운 일로 청탁을 한 적이 없었다. 손수 친척의 이름을 기록해놓았다가 질병, 혼인, 상사가 생기면 반드시 두루 도와주었고 녹봉을 나누어 줄 적에도 반드시 가난한 일가에게 먼저 주었다. 그런데 오직 성실에만 힘쓰고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

널리 배우고 기억을 잘 하였으며 시문(詩文)을 지을 적에 오로지 기격(氣格)을 숭상하였다. 고시(考試)할 적에 먼저 동석(同席)한 사람들과 더불어 특이한 것은 뽑고 객쩍은 것은 도태한 다음에 다시 떨어진 시험지를 열람하다가 억울한 사람이 있으면 합격시켰으므로 백에 하나도 실수하지 않았다. 공이 일을 근면하고 민첩하게 보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는데, 세상 사람들이 “공의 행의(行義)와 정사가 문학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어찌 그러하겠는가? 어찌 그러하겠는가
?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이한(李漢)의 딸인데, 2 4녀를 낳았다. 맏아들 임숭로(任崇老)는 찰방(察訪)이고, 둘째 아들 임영로(任榮老)는 문과에 장원하고 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벼슬이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이르렀다. 맏딸은 부사(府使) 남궁제(南宮悌)에게, 둘째 딸은 현감(縣監) 이준(李浚)에게, 셋째 딸은 군수(郡守) 신홍점(申鴻漸)에게, 넷째 딸은 종실 흥령군(興寧君) 이수전(李秀筌)에게 시집갔다. 임숭로의 아들 임기(任奇)는 벼슬이 감역(監役)이었는데, 일찍 죽었다. 임영로는 4 3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임혁(任奕)은 현령(縣令)이고, 둘째 아들 임연(任兗)은 승지(承旨)이고, 셋째 아들 임장(任章)은 목사(牧使)이고, 넷째 아들 임상(任商)은 별좌(別坐)이며, 첩에게서 난 2남은 임입(任立)ㆍ임곤(任袞)이다. 맏딸은 진사(進士) 이직(
)에게, 둘째 딸은 윤응빙(尹應聘)에게, 셋째 딸은 이승윤(李承尹)에게 시집갔다. 외손(外孫) 7명이다. 남궁행(南宮荇)ㆍ남궁명(南宮蓂)ㆍ남궁헌(南宮)ㆍ남궁영(南宮英)은 남궁씨의 아들이고, 승지(承旨) 이덕수(李德洙)는 이씨의 양자이고, 신계확(申繼濩)은 신씨의 양자이고, 풍해군(海君) 이호(李浩)는 흥령군의 아들이다. 증손자는 11명이다. 임기는 2남을 두었는데, 맏아들 임숙영(任叔英)은 문학과 덕행이 세상에서 으뜸갔으나 벼슬은 지평(持平)에서 끝났고, 둘째 아들은 임세영(任世英)이다. 임혁의 아들 임진백(任震伯)은 생원(生員)이다. 임연은 2남을 낳았는데, 맏아들 임준백(任俊伯)은 경력(經歷)이고, 둘째 아들 임의백(任義伯)은 좌랑(佐郞)이다. 임장은 4남을 두었는데, 맏아들 임선백(任善伯)은 문과 출신 현감(縣監)이고, 둘째 아들은 임강백(任康伯)이고, 셋째 아들은 임형백(任衡伯)이고, 넷째 아들 임한백(任瀚伯)은 참봉(參奉)이다. 임상은 2남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임경백(任慶伯)이고, 둘째 아들은 임계백(任繼伯)이다. 임숙영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일찍 죽어 임준백의 아들 임지(任至)로 후사를 삼았으나 또 일찍 죽었다. 임선백의 아들 임중(任重)은 문과 출신 주서(注書)이다. 안팎의 증손과 현손은 매우 번창하여 지금 다 기록하지 않는다.

최 목사는 바로 신씨의 사위 진사(進士)
최전(崔澱)의 아들로서, 임숙영과 같이 학문을 논하고 서로 사이가 좋으므로 공의 문헌(文獻)을 고증할 수 있다. 공이 남긴 글 10여 권이 있었는데, 집에 소장된 문적과 아울러 병화(兵火)에 소실되어 벼슬을 역임한 연도를 또한 자세히 알 수 없으니, 매우 애석하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인재와 문물(文物)이 모일 때 영걸(英傑)이 흥기하는 바인데, 그 누가 힘써 분발하여 남들보다 먼저 등용되지 않으려 하겠는가? 공이 시험을 볼 때부터 선비들이 그 재능에 양보하였고, 사람들에게 시험을 보일 적에는 벼슬아치들이 그 명철(明哲)에 양보하였도다. 어찌하여 끝내 시험해 보지 못한 채 이미 지극했다가 기울어졌단 말인가? 사람들은 공이 억울하다고 하지만 공은 평탄한 길을 밟았도다. 내가 그 세대를 논하건대 이 덕()이 시행되었도다. 그 후손이 창성하고 그 명성이 드날리었도다. 이것을 일러 잊지 않았다고 한 것이니, 어찌 명()이 필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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