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관리
ㆍ작성자 임성필
ㆍ작성일 2016-07-13 (수) 21:32
ㆍ추천: 0  ㆍ조회: 388       
ㆍIP: 113.xxx.198
임 판서(任判書) (諱 國老) 묘지명(墓地銘) (아계유고 6권)
                                                  임 판서(任判書) 묘지명(墓地銘)

                                                                                              저자 : 아게유고 6권
공(公)의 휘는 국로(國老)이며, 자는 태경(鮐卿)인데 뒤에 자를 태수(鮐叟)로 바꾸었다. 호는 죽오(竹塢)이며, 본관은 풍천(豐川)이다. 원조(遠祖)인 휘 주(澍)는 고려에 벼슬하여 어사(御史)가 되었으며, 휘 자송(子松)은 시중(侍中)이며, 휘 덕유(德儒)는 풍산군(豐山君)이며, 휘 구(球)는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참지 문하정사가 되었다. 그가 낳은 휘 복생(復生)은 상사(上舍)이며, 상사가 낳은 휘 장손(長孫)은 통례(通禮)에 증직되었는데, 그가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인 휘 제(濟)는 좌승지에 증직되고, 조(祖)인 휘 명필(明弼)은 참봉인데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휘 윤(尹)은 황주 목사(黃州牧使)인데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에 증직되었다.공은 가정(嘉靖) 정유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7, 8세에 시(詩)를 능숙하게 지었는데, 성률(聲律)까지 모두 갖추었다. 사람들이 그의 시를 전송(傳誦)하는 자가 많았다. 신유년(辛酉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임술년(壬戌年)에 처음 벼슬길에 올라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예천(例遷)으로 봉상시 주부가 되었다가 호조 좌랑과 병조 좌랑이 되었다. 무진년에 나가서 충청 도사가 되고 기사년에 들어와서 예조 정랑과 형조 정랑이 되었다. 경오년에 또 기막(畿幕)에 좌임(佐任)되었으며, 신미년에 기성(騎省)의 낭중(郞中)과 직강(直講)이 되고, 임신년에 영접도감 낭청에서 파직되었다. 계유년에 정언에 제배되고 다음해에 지평에 제배되었다가 장령에 승직되고 서윤(庶尹)과 사예(司藝)와 내섬시 첨정(內贍寺僉正)을 역임하였다.을해년에 또 정언이 되었다. 당시에 대부인(大夫人)이 역질에 걸렸다. 공이 약(藥)을 드리면서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는데, 불결한 지경이 되어도 대부인이 따르지 않으면 간혹 한 사발을 다 마실 때까지 울면서 권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병이 나았다. 이번에는 공이 눕게 되어 거의 일어나지 못할 뻔하다가 다행스럽게 소생하였다. 그 해에 부모 봉양을 이유로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기를 빌었다. 겨울에 판서공(判書公)이 병을 앓게 되어 와서 병수발을 하자, 대간(臺諫)이 관직을 비워둘 수 없다는 것으로 논핵하여 파직시켰다. 이윽고 상을 당하여 삼 년 동안의 여묘살이를 마치고 나서 장악원 첨정에 제수되었으며, 장령과 집의로 전직되었다가 체직되고 사성에 제배되었다.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영남에 갔다가 돌아와서 사간(司諫)에 제수되고, 다음해에 또 그렇게 하였다.경진년에 군기시 정을 역임하였는데, 이 해에 중승(中丞)과 사간이 된 것이 모두 두 번씩이었다. 얼마 후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가 좌부승지로 승직되었고 겨울에는 전주 부윤으로 나갔다. 임오년에는 본도의 방백으로 승직되었고 계미년에는 은대(銀臺)로 환직되어 우승지에 이르렀다가 예조 참의로 이직되었다. 을유년에 이조로 전직되었다가 곧바로 도승지에 제배되었다. 병술년에 곤궁(坤宮)이 병환이 나셨다가 회복되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직되었다. 정해년에 미원(薇垣)과 오부(烏府)의 장으로 이직되어 우윤과 형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무자년에 재차 옥당의 장이 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다시 미원과 오부의 장이 되었다가 얼마 후에 이조 참판이 되었다.기축년에 변란이 발생하자, 권력자의 침해를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고 외방으로 축출되니, 온 집안이 공포에 떨었지만 공은 면식(眠食)을 편히 하였다. 신묘년에 옥사에 잘못 걸려든 자를 서용하라고 명하고 헌장(憲長)으로 소환하였는데, 체임되어 성균관의 장이 되었다. 임진년 왜란 당시에는 조도검찰사(調度檢察使)와 분호조 참판이 되어 삼 년 동안 서로(西路)에서 체류하였다. 갑오년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르고 재차 호남백(湖南伯)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정유년에는 내전(內殿)을 호위하여 해서(海西)로 갔으며, 기해년 봄에는 이조 참의에서 형조 판서로 탁배되었고 다시 도헌(都憲)이 된 것이 두 번이었다.경자년에 또 형조 판서가 되었다가 이조(吏曹)로 옮겼다. 당시에 태보(台輔)의 자리가 비어서 누차 복상(卜相)에 참여하였다가 겨울에 파직되었다. 신축년에 군직(軍職)에 서용되었다. 임인년에 공의 맏아들 부제학공(副提學公)이 정주(定州)에서 들것에 실려 돌아와 백지촌(白之村)에서 세상을 떴다. 이로부터 슬픔으로 몸을 상하여 두문불출하고 지내다가 갑진년 9월 14일에 광릉(廣陵)에 있는 교사(僑舍)에서 병으로 졸하였다. 광릉 정평(庭坪)의 인좌신향(寅坐申向)의 언덕에 장사하였는데 선영을 따른 것이다.공은 평소에 망녕된 말이나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생산업을 경영하지 않았다. 일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충분히 생각한 뒤에 행하였으며, 성격이 순수한데다 근실하고 중후하였다. 거드름을 피우거나 겉치레를 일삼지도 않았다. 유별난 행동을 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마음은 확고하였다. 세상의 시끄러운 일을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하고 많은 사람들이 치달아도 홀로 형적을 감추었으니, 대개 이는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내자(內子)는 종부시 정 한원(韓垣)의 딸인데,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몽정(蒙正)은 바로 부제학공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군수 조윤신(曺胤申)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다. 장남 선후(善後)는 일찍 죽고 차남은 선복(善復)이다. 둘째인 취정(就正)은 과거에 합격하여 서산 군수(瑞山郡守)가 되었고 판관 경시정(慶時精)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석후(錫後)이고 차남은 경후(慶後)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막내 수정(守正)은 과거에 급제하여 전 홍문관 교리를 지냈고, 지사 김우서(金禹瑞)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다. 장녀는 유학 이상검(李尙儉)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딸은 종실 파산수(坡山守)에게 출가하여 2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나는 약관 시절부터 공과 서로 알았다. 조정에 벼슬하던 때도 취미가 또 다르지 않아서 서로 마음을 트고 지낸 지가 오래니, 하루아침에 연회에서 좋아진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공이 나보다 두 살이 많지만 오히려 건강하였다. 그가 광촌(廣村)에 우거할 때에 나는 검촌(黔村)에 우거하고 있었으므로 매번 강사(江寺)에서 하룻밤 같이 자기로 언약을 하고서 차일피일 미뤄 오다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누가 공이 나보다 먼저 심한 병을 앓다가 갑자기


떠나리라고 여겼겠는가. 아, 슬픈 일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순후한 풍습이 흩어졌기에
大朴散사람들은 형식만을 추구하는데
人務飾공은 참다움도 보전한데다
公葆眞타고난 자질을 잘도 간직하였네
素厥質일찍이 벼슬길에 나아가더니
早蜚英팔좌까지도 올라갔다네
登八座월계관이 연이어 빛나니
桂聯輝값이 없는 보배이어라
玉無價행동하기 전에 반드시 생각하고
動必思겸손할 줄도 스스로 알았다네
謙自知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길을
殿衆趨확고한 마음으로 옮겨 가지 않았네
確不移자식 잃은 슬픔을 억제하지 못했으니
痛傷明하늘은 어찌 그리 깜깜한지
天胡瞢심한 병을 앓은 것은
病沈嬰정이 모인 바라네
情所鍾벼슬에 그칠 줄 아는 것을
仕知止예전에도 어려운 일이라 했는데
古云難들녘에 은둔하였으니
遯于野공은 홀로 편안했었네
公獨安죽어서 돌아가니
歸乘化영원토록 부끄럽지 않으리
永無愧이치가 어둡지 않으니
理不冥경사도 실추하는 일이 없으리라

慶無墜
출처 : 한국고전 종합 고전번역서 >아계유고 >아계유고 제6권 >지류(誌類) >
   
  0
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