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관리
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16-07-14 (목)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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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14世 승지공 (諱 呂) 묘비문
                                                                  
                                        
                            通政大夫右副承旨任呂墓表

 公의 諱는 呂요 字는 君望이시며 姓은 任氏이시니 豐川은 그의 本貫이다. 遠祖 御史大夫諱는 澍와 侍中西河府院君 工曹判書 文簡公 諱德儒 三世 麗末에 大顯하셨고 文簡公의 胤子 諱球가 朝鮮太祖에 官職이 資憲大夫參知門下府事에 이르시니 곧 公의 五世祖이시다. 考諱는 南部參奉贈左贊成 諱는 明弼이시며 妣는 贈貞敬夫人海平尹氏이시니 僉正諱萱의 따님이로 西紀一五二二年 中宗壬午年에 公을 낳으셨다. 公이 二十二歲에 生員進仕에 入格하시고 翌年甲辰에 別試文科及第하시니 內職으로 司諫院 正言獻納과 兵曹正郎등을 거쳐 承政院同副承旨에 拔擢되시어 右承旨에 이르시고 戶曹參議등을 歷任하셨으며 外任으로 抱川寧海縣監과 北靑潭陽府使의 黃州牧使로 여러 고을을 다스렸고 中間에 春秋館記事로 中仁兩朝實錄編修에도 參與하셨거니와 監軍御史로 湖南兵水營에 軍政을 糾廢하신바도 있다. 明宗壬戌正月二十二日에 卒 하시니 春秋四十一이며 京畿道廣州東部面豐山里紫蒲谷坤坐原에 安葬하니 外舅黃公墓階下이며 贊成公墓와 不過 數里의 近地이다. 嗚呼라 公이 崔晩生子로 有娠中에 이미 失怙하였는데도 能히 伯氏牧使公 諱尹과 仲氏 文靖公 諱說의 뒤를이어 弱冠의 妙年으로 大小科를 連捷하시니 淸顯의을 歷揚하셨고 物望도 있었다는 簡策속의 記事로 보아 그 天分에 甚히 놓으셨고 文藝 또한 夙成하셨으며 於內診外에 謂無不可한 才能을 具備하셨던 것을 足히 推進하고 남음이 있다. 뿐만아니라 公의 兄弟 三人이 다 함께 文學으로 一世에 울렸고 萃要에 班列을踐歷하여 金玉의 品秩에 올랐으며이어 諸孫이 蔚然繼起하였다는 公의 祖考兩世의 墓碑中의 이말은 當時 一世의 名士로 艶稱되었던 사실을 記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은 不幸하계도 年壽를 얻지 못하며 그 抱負와 力量을 펴지못하시고 不惑의 强仕期에 早沒하셨으니 이 어찌 一門後裔만의 恨이리오 淑夫人昌原黃氏는 僉正瑜의 따님이며 兵曹判書 衡의 손녀이시다. 生卒年代는 未詳이나 十二月二十九日은 그의 忌日이며 公墓에 雙封으로 合祔하였다. 三男一女를두셨는데 長은 繼黃이니 通德郞이요 次는 繼老이니 贈吏曹參判이며 庶尹 權守己는 女婿이시다. 孫에 翼齡 鳳齡 鵬齡은 長房出이요 江原道觀察使 碩齡과 軍資監奉事 과 彭麒과 齡齡은 次房出이다. 曾玄以下는 다 記錄하지 못한다. 이제 公이 逝去하신지 四百二十有餘年이 되었다. 至于今 그 阡表없음을 悚懼하던 後孫들이 정성드려 한 貞石을 갖추어 놓고 그 글를 나에게 請해 왔다 .나는 文靖公의 後孫으로 傍裔가 되는지라 敢히 承當어려운줄 알면서 끝내 固辭하지 못하고 삼가 그 家牒과 史策을 考閱하여 公의 生卒 및 歷官등 十의十二만을 收錄하고 그 文章과 行誼에 대하여 一言미치지 못한 것을 이미 오랜 옛날거듭된 兵火文籍이 散失되어 可徵할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他日에 보다 새로운 發見으로公의 文章의 富와 行誼의 美도 아울러 傳케 할 수 있는 그날을 다시 候人에 期待하는 바이다.

從十參三代孫 昌宰 삼가 글짓고 글 쓰다.
西紀一九八四年歲在甲子十月 日 豐川任氏承旨公派宗會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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