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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20-10-08 (목)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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吏曹判書任公神道碑 除幕式



吏曹判書任公神道碑 除幕式




朝鮮國宣祖朝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領經筵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觀象監事世子師輔國崇祿大夫行吏曹判書任公神道碑除幕式이2020년 10월 3일 10:00에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시장리 묘역에서 목사공파 종회장과 죽오공파 종회장 및 각파 임원들이 참석하여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豐川任氏 15世 죽오공 諱國老 자(字)는 태수(鮐叟) 호(號)는 죽오(竹塢)이시며 高祖父는 교수공 諱長孫 이시고, 曾祖父는 훈도공 諱濟 祖父는 찬성공 諱明弼 이시고 先考는 양주목사 諱尹 이시며, 二男 중 次子로 1561년(명종1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셨다가 봉상시 주부, 호조 좌랑, 정언,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셨다.
1582년(선조15) 전라도 관찰사로 나아갔고, 그 뒤 중앙으로 돌아와 도승지, 대사헌, 대사성, 대제학 등을 지내고 1589년 이조참판을 역임하셨다.
1591년 다시 대사성으로 기용되고, 이듬해 임진왜란 때는 조도검찰사(調度檢察使) 분호조 참판을 지내면서 3년간 평안도에 머물렀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왕비를 호위하여 황해도에 피난하셨다. 1599년 형조판서에 이어 다시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후에 品階가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에 追贈 되었다.
1604년 서거(逝去)하신 지 언언 416주기인 경자(庚子)년에 죽오(竹塢)공 선조의 명성과 위상을 재조명하여 후손에 전하고자 종원들의 뜻을 모아 성금으로 신도비를 건립하고 제막식에는 내빈을 초청하여 성대히 거행하려 계획하였으나 예기치 않은 코로나 19사태로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 시행 중이라 정부의 정책을 따르기 위하여 회장단과 지파일부 종친들만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제막식을 하였다.




 

▲ 吏曹判書任公神道碑除幕式





 

▲ 神道碑除幕式 參席者記念


 

 

▲ 輔國崇祿大夫行吏曹判書任公神道碑



朝鮮國宣祖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經筵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觀象監事世子師輔國崇祿大夫行吏曹判書任公神道碑幷序



故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經筵輔國崇祿大夫行吏曹判書任公의 諱는 國老요 號는 竹塢요 字는 鮐叟이며 豐川人이라 先考贈資憲大夫吏曹判書通政大夫行楊州牧使諱尹께서 先妣貞夫人 安東權氏 倉守四傑女를 娶하여 生二男 一女두셨으니 長子 廷老는 慈山郡守요 次子는 國老이시며 女는 李應麟에게 出嫁하였다. 公께서는 一五三七年 丁酉年에 出生하여 어려서부터 총명 顈悟하였고 七,八歲에 능히 詩를 지어 사람들이 많이 傳誦하였다. 二十五歲에 生員 進士兩試에 合格하고 다음 해에 文科別試에 丙科及第하여 大小官職을 歷任하고 一五七五年에 正言으로 되었으나 어머니가 역병에 걸려 至極精誠으로 侍湯하여 병이 나으셨다. 그해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水原府使를 자원해서 나갔다. 겨울에 아버지가 得病하여 집에서 간호하던 중 臺諫이 職務를 오랫동안 비웠다고 탄핵하여 罷職되었다. 그리고 곧 喪을 당하여 三年 동안 侍墓를 살았으니 그 孝誠이 至極하셨다. 一五八二年 全羅道觀察使 一五八五年 都承旨 一五八七年 大司憲이 되었다.
都憲職에 四次에 起用됨은 法을 公明正大하게 하였음이다. 一五九二年 壬辰倭亂 時는 調度檢察使, 分 戶曹參判으로 三年間 平安道, 黃海道地方에서 活躍하다. 一五九四年에 어머니 喪事를 당하여 복을 마치고 一五九七年 丁酉再亂시 王妃를 扈從하여 黃海道로가 扈聖功臣으로 忠臣錄에 登載되었다. 一五九九年 刑曹判書에서 吏曹判書로 옮겼을 時 政丞缺員이 있을 때마다 品階가 輔國崇祿大夫라 屢次卜相望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官爵에 욕심이 없었고 財産을 축척 하지 않고 청빈하게 사셨다. 公의 長子 副提學 蒙正이 定州牧使로 나갔다가 得病하여 수레에 실여 돌아오던 途中 白川에서 死亡하니 學文과 名筆이 뛰어나 家門의 棟樑이라 기대가 컸는데 일찍 가니 哀惜傷心 하여 杜門不出하다 得病하여 一六0四年 九月十四日 廣陵 寓舍에서 逝去하시니 享年 六十八歲 이시다. 品階가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에 追贈 되었다. 初葬於 庭坪 先塋 寅坐에 모셨다가 新陵里 卯坐로 移葬 夫人과 合葬 지역의 개발로 一九七五年 笠場面 侍壯里 山二番地乙坐로 再 移葬하였다. 室 貞敬夫人 淸州韓氏는 寺正 垣의 따님으로 生 三男 一女를 두셨으니 副提學 蒙正과 禮曹判書 就正과 校理 守正이다. 三兄弟 모두 科擧及第 하였고 壻 李應祐이다. 蒙正의 子 通德郞 善後요 孫은 璥이며 次子는 開城留守 吉後요 孫은 琓이다. 就正의 子 南平縣監 錫後요 孫은 世登이고 次子는 泰仁縣監 慶後요 孫은 震登과 起登이요 三子 繕工監直長 光後요 孫은 通德郞 翰登이고 四子 吏曹正郎 興後요 孫은 玄登이다. 守正의 長子 吏曹正郎 德後요 孫은 通德郞 俊登과 行登과 性登이요 次子 四山監役 汝後요 孫은 元登이며 三子는 貞僖公 有後요 孫은 翊登이다. 四子는 監役 之後요 孫은 戶曹參判 行益이다 曾孫까지만 쓰고 줄인다. 貞敬夫人 韓氏는 喪夫 十四年을 白衣 素食하며 哭泣如初 하고 定州牧使 蒙正 終에 自稱 罪人이라 何以 見天이라 蒼楹之外不出一步라 烈行旌閭事載續三綱錄에 登載되었고 校理 守正은 三年 廬墓를 살며 哀絰을 한 번도 벗지 않고 侍墓하니 至孝卓行出於天也라 一鄕士子合聲申 하였고 贈職參判 有後 孝行淸白志操與行誼之實狀誠하여 相臣 李敬輿와 儒臣이 所達合有旌閭之典하니 上曰特爲贈職旌閭하라 命하시니 五代天官長하고 三傳烈孝旌하니 嗟吾武所似나 墜落 驩家聲이라 後孫들이여 孝는 본받을지어다. 貞敬夫人은 一五三七年 戊戌生으로 一六一七年 丁巳 九月二十六日 別世하시니 享年 八十歲이다.

                                                                                後孫 國彬 謹書


鵝溪 先生께서 我祖의 人品과 處世한 銘文이 明鏡과 같아 실으니 大朴散 순후한 풍습이 흩어 젔기에 人務飾 사람들은 형식만을 추구하는데 公葆眞 공은 참다움을 보전한 데다 素厥質 자질을 잘도 간직하였네 早蜚英 일찍이 벼슬길에 나가더니 登八座 팔좌 까지도 올라갔다네 桂聯輝 월계관이 연이어 빛나니 玉無價 값이 없는 보배어라 動必思 행동하기 전에 반드시 생각하고 謙自知 겸손할 줄도 스스로 알았다네 殿衆趨 많은사람들이 추구하는 길을 確不移 확실치 않으면 옮기지 안았네 痛傷明 자식 잃은 슬픔을 억제하지 못 햇으니 天胡菅 하늘은 어찌 그리 깜깜한지 病沈嬰 병을 앓는 것은 情所鍾 정이 모인 바라네 仕知止 벼슬에 그칠 줄 아는 것을 吉云難 예전에도 어려운 일이라 했는데 遯于野 들녘에 은둔하였으니 公獨安 공은 홀로 편안했었네 歸乘化 죽어서 돌아가니 永無愧 영원토록 부끄럽지 않으리 理不冥 이치가 어둡지 않으니 慶無墜 경사도 실추하는 일이 없으리라
                                                                  領議政 李山海 撰



오랜 세월 竹塢公 神道碑 成碑의 꿈을 仁川 通德郞 翰登公 後孫等의 巨金喜捨가 基本이 되었고 宗親 諸位의 誠金과 牧使公派宗中의 支援으로 設立하니 조그만 孝心이라도 그 뜻이 매우 높아 銘名하고 我祖의 至大한 功績과 崇德을 길이 保傳 코져 비를 세워 後世에 전한다.

                                                                     二0二0年 六月 日 立



                                                             豐川任氏牧使公派 會長 昌宰 建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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