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록
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20-04-23 (목)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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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17世 승지공 임효달(任孝達) 문헌
17世 임효달(任孝達) 1584(선조17)생 ~ 1646(인조24)졸

자는 술지(述之) 양주목사(陽州牧使) 윤(尹)이 증조요, 자산군수(慈山郡守) 정로(廷老)가 할아버지요 진사(進士)홍정(弘正)이 아버지요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 호원(好元)의 딸이다.
1603(선조36)년20世에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고, 1610(광해군2)년 27世에 문과(文科) 식년시(式年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숭문원(崇文院)에 선보(選補)되였고 다음해에 할머니 상사를 당하였다.
복(服)을 마치고 박사(博士)로 승진, 다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청도군수(淸道郡守)로 나갔다.
그리고 바로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드디어 지리산(智異山) 아래 섬진강(蟾津江)위에 전지를 사고 집도 짓고는 이곳에서 은거(隱居)할 작정을 하였다. 이때 공의 종(從叔)인 판서(判書)취정(就正)이 현달하기도 했고 권세도 있어서 요직에 나갈 길도 있었으나 공이 멀리 이 전라도 광양(光陽)땅으로 자취를 감추고 서울로 돌아올 뜻이 없었다.
이에 종숙 판서가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꾸짖고 불러올리려 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그러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되면서 광해군에게 아첨해 붙었던 자는 모두 화를 당하였으나 공은 아무 탈이 없었다.
공은 이미 호산의 아름다움과 전토의 비옥함을 좋아하여 부모의 분묘까지 광양 땅으로 옮기고는 그대로 살려고 하였으나 그 뒤에 다시 벼슬길로 나가 나이는 늙고 아들도 없어서 남녘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되자 향상 슬퍼하고 추모하면서 선영의 실전(失傳)을 뉘우쳤다.
1621(광해군13)년에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가 되었고, 인조(仁祖)초년에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이 되었다.
뒤에 공주(公州) 성주(星州) 청풍(淸風) 광산(光山)충주(忠州), 갑산(甲山), 종성(鍾城) 능주(綾州) 등 여러 고을의 목사(牧使)와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는데 종성부사로 갈 때는 통정(通政)으로 승진되어 나갔다.
중앙관직으로는 제용감(濟用監) 종부사(終傅寺), 군기사(軍器寺), 군자감(軍資監), 사복시(司僕寺) 등의 장(長)을 역임하였고, 성균관(成均館)의 직강(直講), 사예(司藝), 사성(司成)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필선(弼善)과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 사헌부 장영(司憲府掌令), 사간원 정언(正言) 등을 지냈는데 장영을 더욱 여러 번 지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는 명성을 구하지 않았고 갑산과 능주 에서는 편의한 일들을 논하여 되도록 이익이 백성에 미치도록 힘썼다.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에 사헌부에서 김상헌(金尙憲)을 몰아내자고 청하였을 때 공은 김 공이 당파를 좋아하는 것만을 지적하고 배격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았고 또 정온(鄭蘊)은 죄줄 수 없다고 극력 말하였다.
이와 같이 공은 어디까지나 공정성을 굳게 지켜서 자기의 소신대로 나갔고 일체 편파적인 태도에는 단연 따르지 않았다. 뒤늦게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가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으나 나이가 많고 병이 있음을 이유로 은퇴하였다.
1646(인조24)년 12월 15일에 주자동(鑄字洞) 옛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실(室)은 파평윤씨(坡平尹氏) 감사(監司) 경립(敬立)의 딸인데 공보다 4년 뒤에 졸하여 초일리(草一里)에 합장하였다.
아들이 없어서 삼종(三宗) 형백(衡伯)의 아들 기(基)를 양자로 들였는데 기(基) 또 아들이 없어서 명원(命元)으로 뒤를 이었다.
아들에 숙(琡)이 있다. 딸이 다섯인데 사위는 참판(參判) 권두경(權斗慶), 참판(參判) 유철(兪㯙), 판관(判官) 이석명(李錫命), 이진하(李震夏), 참봉(參奉) 심서규(沈瑞圭)다.

[자료 任相元著 恬幹集 右副承旨任公墓碑銘]

출처 : 豊川任氏 文憲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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