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록
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20-04-23 (목)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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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14世 목사공 임윤(任尹) 파시조

14世 목사공 임윤(任尹)
1501(연산군7)生 ~1574(선조7)卒
자는 군빙(君聘), 남부참봉(南部參奉) 증좌찬성(贈左贊成) 명필(明弼)의 맏아들이요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구(球)의 현손(玄孫)이시며, 한성판윤(漢城判尹) 열(說)이 형이시다.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 첨정(僉正) 훤(萱)의 딸이시다. 1534(중종29)년 34世에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고, 1538년 38세로 문과 별시(別試)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였다. 명종실록(明宗實錄)에 의하면 명종13 (1558)년에 왕의 특지(特旨)로 사건원 사간(司諫院司諫)이 되었고 다음해에 전라어사(全羅御史)로 나가 기민(飢民)의 구호상황을 독찰(督察)하였으며, 16년에 황주목사(黃州牧使)가 되고 양주목사(楊洲牧使)가 되었다. 선조(宣祖)때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와 오위장(五衛將)에 부직(付職)되기도 하였는데 2년(1569)에는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정사(正使) 이언경(李彦璟), 서장관(書狀官) 권수(權隨)와 함께 명나라 북경에 다녀왔다. 미암(眉岩) 유희춘(柳希春)의 일기에 공과 상종한 일들이 보이는데 공이 70세되던 1570(선조(宣祖3)년 9월에 당시 경기도사(京畿道事)였던 아들 국노(國老)가 공과 동방(同榜)에 급제한 임내신(任鼐臣). 원호섭(元虎燮). 이담(李湛) 및 유희준(柳希春) 등을 초청하여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는 기록도 있다. 보첩에는 졸한 해가 기록되어있지 않으나 미암 일기에 공의 나이 74세까지의 기록만이 있고, 공의 아들 국로의 묘지(墓誌) [*영의정(領議政)이산해(李山海)가 지었음]에 “갑술년 1574년선조7) 겨울에 판서공(判書公) 상사를 당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1574년에 74세로 졸하였음이 분명 한듯하다. 묘는 경기도 광주 정평(廣庭州平) 선영아래 간좌(艮坐)에 있는데 오늘의 지명으로는 광주군 서부면 초일리(廣州郡西部面草一里) 이성산(二星山) 아래이며 부인과 합장(合葬)되어있다. 실(室)은 안동 권씨(安東權氏), 창수(倉守) 사걸(四傑)의 딸이며,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정노(廷老)는 진사(進士)시험에 합격, 자산군수(慈山郡守)를 역임하였고, 차남 국노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국(輔國)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이에 공에게는 이조판서를 부인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이 추증(追贈)되였다. 사위는 이응린(李應麟)이다. 공은 고조(高祖) 증좌통예(贈佐通禮) 복생(復生)으로부터 4대 동안 부진했던 가세(家世)를 공의 대에 이르러 아우 열(說). 여(呂)와 더불어 모두 대소과(大小科)에 아홉 번이나 올랐고 당상관(堂上官) 이상이 되어 침체했던 가문의 영광을 되찾았으며, 3형제의 후손 또한 번성하고 현달하여 많은 명유(名流)가 배출되었다.

후손(後孫) 창순(昌淳)이 지은 공의묘비(墓碑)에서
출처 : 풍천임씨 문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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