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록
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20-04-23 (목)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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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15世 죽오공 임국로任國老) 문헌
15世 죽오공 임국로 (任公 國老)
1537(중종32)년생 1604(선조37)년졸)

자는 태경(태卿), 뒤에 태수(태수)로 고쳤으며 호를 죽오(竹塢)라 하였다.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양주목사(楊洲牧使) 윤(尹)이요,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 다.
어려서부터 총명 영오(穎悟)함이 보통아이와 달랐고, 7~8세에 능히 시(詩)를 지어 사람들이 많이 전송(傳誦)하기도 하였다.
1561(명종16)년 25세에 생원(生員). 진사(進士) 두시 험에 합격하고, 다음해 문과(文科) 별시(別試)에 병과(竝科)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고, 관례에 따라 봉상시 주부(奉常시主簿)로 옮기고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1568(선조1)년에 지방으로 나가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가 되었고,이둠해 중앙으로 들어와 예조(禮曺)와 형조(刑曹)의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그 다음해 또 경기도사(京畿都事)로 나갔다가 다음해 1571(선조4)년에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병조정랑(兵曹正郞).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을 거쳐 1572년에는 영접도감(迎接都監) 낭관(郎官)으로 파직 당했다.
다음해에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서 장령(掌令)으로 승진 되었으며, 이어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내섬시 첨정(內贍시僉正) 등을 역임하고, 1575(선조8)년에 다시 정언이 되었다. 이때 어머니가 여질(癘疾)에 걸려 시탕(侍湯) 할 때 공이 약을 반드시 먼저 맛보곤 하였는데 그 약이 지극히 불결하여 어머니가 따르지 않으면 간혹 한 주발까지도 다 마시고 울면서 권하기도 하여 드디어 병이 나았으나 고이 뒤이어 병석에 누어 거의 일어나지 못할 지경까지 갔다가 다행히 다시 소생하였다. 그해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자원해 나갔다. 그러한 겨울에 아버지가 병에 걸려 집에 와 곁에서 모시면서 간호하던 중, 대간(臺諫)이 직무를 오랫동안 비웠다고 탄핵하여 파면 되였다. 그리고곧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9廬墓)를 살았다.
복을 벗고 장악언 첨정(掌樂院僉正). 사헌부의 장령(掌令. 집의(執義를 거쳐 성균관사성(司成)에 제수되고 재상경차관(灾傷敬差官) 으로 영남(慶尙道)에 갔다 돌아와서는 사간원 사간(司諫)에 제수 되였는데 그 다음해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1580년에 군기시정(軍器시正)을 지냈는데 이해에 집의와 사간을 지낸 적도 모두 두 번이나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이내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 하였고, 겨울에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는데 1582년에는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승진 되였다. 이듬해에 승정원으로 돌아와 우승지(右承旨)에 이르고 다시 예조참의(禮曺參議)로 옮겼으며, 1585년에는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바로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이듬해 왕비(王妃)가 편치않다가 평복된 나라에 경사가 있어 가선(嘉善)으로 승진 되였고, 또 다음해1587년에 사간원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한성부 우윤(右尹)으로 옮겨 가을에는 좌윤(左尹)이 되었다. 이듬해 재차 부제학)副提學)에 임명 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다시 대사간 대사헌이 되었다가 바로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1589년에 기축옥사(己丑獄事)의 변란이 일어나자 당로(當路)자의중상(中傷)으로 관작이 삭탈되어 문밖으로 쫓겨나니 온 집안이 공포 속에 떨었으나 공은 면식(眠食)이 전과 같고 태연자약하였다.
2년 뒤에 횡액(橫厄)에 결렸던 사람을 서용(敍用)하라는 왕명이 있어 공을 대사헌으로 소환(召還)하였고 다시 대사성(大司成)으로 체직 되였다.
1592(선조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에는 조도검찰사(調度檢察使). 분호조참판(分戶曹參判)으로 3년간이나 평안도. 황해도. 지방에 머물러 있었다.
1594년에 어머니 상사를 당하였고 복을 마치매 재차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는 내전(王妃)을 호종(扈從)하여 황해도(黃海道)로 갔다.
1599(선조32)년 봄에 이조참판에서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옮겼는데 이때 정승(政丞)에 결원이 있을 때마다 누차 복상망(卜相望)에 오르기도 하였다. 겨울에 파면되였다.가 다음해에 군직(軍職)에 서용(敍用)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공의 맏아들 부제학 몽정(夢正)이 정주목사(定州牧使)로 나갔다가 병에 걸려 수레에 실려 돌아오던 도중 백천(白川)에서 사망하였다. 이로부터 상심 애도하며, 문밖을 나오지 않다가 1604(선조37)년 9월14일에 병으로 광능우사(廣陵㝢舍)에서 졸하니 나이 68세였다.
품계(品階)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되었다.
공을 처음에는 광주(廣州) 정평선영(庭坪先塋) 인좌(寅坐)에 장사했던 것을 다시 광주 귀천면 암사동 신능리(龜川面巖寺洞新陵里) 묘좌(卯坐)로 이장하여 수백 년을 내려왔는데, 이곳이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개발지구(開發地區)로 책정되어 부득이 1975년 4월에 다시 충청남도 천원군 입장면 사장리(天原郡笠場面侍壯里)산2번지 신좌(辛坐)로 재차 이장하였다.
공이 평일에 방영된 말과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자산(資産)을 경영하지 않았고, 미세한일이라도 반드시 깊이 생각한 뒤에 행하였으며, 천성이 순박(醇朴) 근신하고 후중(後重)하여 가식(假飾)하지 않고 괴벽하지 않으면서도 중심이 확연(確然)하여 세상이 시끄러워도 못 들은 체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달려가도 홀로 자취를 숨기곤 하였다.
실(室)은 청주한씨(淸州韓氏), 종부시정(宗簿寺正) 원(垣)의 딸이며, 열행정역사재속삼강록(烈行旌閭事載續三綱錄)에 올라있다. 3남1녀를 두었는데 세 아들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맏아들 몽정(夢正)은 부제학(副提學), 둘째아들 취정(就正)은 예조판서(禮曹判書), 셋째아들은  수정(守正) 은 교리(敎理)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시(壬辰倭亂時)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서 충신록(忠臣錄)에 등재(登載)되여 있다.
                                      [領議政 李山 海撰 . 任判書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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