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록
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20-04-23 (목)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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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16世 운호공 임몽정(任蒙正) 문헌
16世 임몽정(任蒙正) 1589(선조22년)생 ~ 1667(현종8)년 졸)

자는 직초(直招) 호를 운정(雲汀) 또는 운호(雲湖)라 했다. 이조판서(吏曹判書) 국노(國老)의 맏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 영오(穎悟)하고 학업에 부지런ㅎl 힘써 약관(弱冠)에 이미 시(詩)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1582(선조12)년에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였고, 1584년에 문과 별시9別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니 나이 26세 이었다. 처음에는 승정원 권지부정자(承文院 權知副正字)에 보직 되였고 이듬해에 사국(史局)에 추천되어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어 대교(待敎). 봉교(奉敎)를 거쳐 관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이 되었고 이내 병조(兵曹) . 형조(刑曹)의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22년)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고, 다음해에 형조정랑(刑曹正郞) 으로 있다가 명천현감(明川縣監) 으로 좌천되어 나간 것은 집권자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이었는데 다시 파직되어 돌아오니 명천고울 백성들이 길을 막고 울부짖었다.
다음해에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어 호당(湖當)에 피선 되었 고홍문관(弘文館)으로 들어가 수찬(修撰)을 거쳐 교리(校理)로 승진 되였다가 1592년(선조25)년에 파면 되였다. 2년 뒤에 병조 낭관(郎官)으로 있다가 또 함종현령(咸從縣令)이 되어 지방으로 나가 임진왜란으로 폐지 된 것을 다시 일으키고 비었던 창고를 넘치게 했으며, 흩어진 인민을 불러 모아 안도(安堵)속에 살게 하였다. 이 사실을 보고되매 임금은 특별히 포상(褒賞)하는 유지(諭旨)를 내렸으며 승진시키라는 명령을 누차 내렸다.
1587(선조20)년에 중앙으로 돌아와 홍문관 교리와 수찬을 역임하고 겨울에 길주목사(吉州牧使)로 나가 병사(兵事)를 다스리고, 인민을 무마함이 모두 득당하여 어사(御使)가 포상토록 장계하였다. 2년 뒤에 소환되어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발탁, 당상관(堂上官)이 되었고 우승지(右丞旨)로 승진 되였으나 병으로 체직(遞職)되였다. 다시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고, 얼마 안 되어 예조참의(禮曺參議)로 옮겼다가 다시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는데, 1600(선조33)년에 아버지 죽오(竹塢)공이 이조판서가 됨으로 해서 상피법(相避法)에 의해 체직 되였다. 다시 대사간에 제수(除授)되고 곧 부제학이 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정주목사(定州牧使)가 되어 나가니 선정(善政)의 명성이 함종현령 때보다도 더했다. 그러나 1601년 겨울부터 병에 걸려 수차례 실려 고향으로 돌아오던 도중 증세가 더욱 위독하여 1602(선조35)년에 필경 백천(白川)마을 집에서 졸하니 나이 44세였다.
공은 재주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있어 모두 원대한 앞날을 기대한 바 있으며, 효행과 우애가 돈독하여 가정 안에 비평하는 말이 없었고, 친구를 대하는 데는 한결 같이 성실로서 하였다. 천성이 문장을 좋아 하였고 더욱 시(詩)에 능하였는데 병중에도 이를 폐하지 않았다.
실(室) 창녕 조씨(昌寧曺氏) 군수(郡守) 윤 신(胤申)의 딸이며, 아들에 선후(善後). 길후(吉後)가 있다.
묘는 광주(廣州) 龜川面) 암사동(巖寺洞) 신능리(新陵里) 선영(先塋) 간좌(艮坐)에 있는데 1975년 포천군좌의리 (抱川郡 佐儀里) 신능 좌 (坐)로 이장하였으며 부인과 합폄 되어있다.
壬辰倭亂 時 扈聖功臣 으로서 忠信錄에 登載되어 있다.

                              領議政 李山海. 撰 任牧使 墓誌銘


출처 : 豊川任氏 文憲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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