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부원군 (諱子松) 묘음표기
서하부원군 묘표음기
공은 풍천 임씨시니 어사대부 휘 주(澍)는 곧 공의 고(考)이시라 고려조 충혜왕(忠惠王) 때 난적(亂賊)을 베시어 특별히 정난공신 (靖難功臣)의 호를 내리고 서하부원군(西河府院君)에 봉작(封爵)되시었다. 분묘에 갈명(碣銘)이 없어 거의 무몰(蕪沒)되였던 것을 가정(嘉靖)七년 (중종23년 서기1528년)에 六대손 철중(鐵中)이 본 고을에 부임하여 비로소 비석을 세우고 음기(陰記)를 새겼는데 숭정(崇禎) 9년 정축 후 18년 효종(孝宗)六년 서기 1655년)에 불초가 본도의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미 해가 오래되어 글자가 민몰됨을 보고 이를 개연하게 여겨 새 돌로 고쳐 세웠다.
을미 1655년 12월 20일
10대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수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의백(義伯)근지(謹誌)
府院君墓 祭文
크시 도다 우리비조(鼻祖) 영록 위대하심 군중에, 뛰어나서 저 먼 고려조 때 난적을 죽이시고, 큰 공을 세우시니 관작을 봉하여 부원군이라 일컬었네.
푸른 솔숲 북녘 언덕에 우뚝 한이 무덤이 오랜 세월 지나오며 제사도 궐하였고 분묘마저 무몰(蕪沒)하여 부노(父老) 들도 슬퍼했으니 가지 잎 번성타한들 후사(後嗣)있다 뉘 이르리. 모든 우리 후손 낯 붉혀야 하리로다.
사람이요 근본을 잊는 다면 수달만 못하리라
공경히 재개하고 묘소을 닦았사오니 삼가 바라나이다. 우리선조의 신이시어 이 정성된 뜻을 굽어 살 피시와 흠향을 더 하소서
방손 관찰사 광(絖)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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