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간행내역
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16-07-16 (토)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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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세보 구 정조 정사보 (1797) 편수전말


 

                                                  구 정조 정사보 편수전말

 당초 해주 보를 간행한지 57年이 되던 영종(英宗) 계해 년(영조19年서기1743年)에 거듭 보단(譜單)을 거두어서 증 찬성공(贈 贊成公) 순(珣)과 승지공(承旨公)사하(師夏)두 분이 상.하편(上下編)을 나누어서 편수하였는데 그 상하편이 완성되기 전에 두 분이 모두 하세(下世)하였다.
정해 년(영조43年 서기 1767年)에 이르러 구단(舊單)은 해가 오래되었고 그 뒤에 난 사람이 더 많다하여 다시 신단(新單)을 거두어서 부여공(扶餘公) 매(邁). 지평공(持平公) 선(珗). 직장공(直長公) 희성(希聖). 아산공(牙山公) 시습(時習)이 그 일을 같이 관장하게 되었는데 지평공이 상편을 편수하시다가 그 탈고(脫藁)를 보지 못하고 졸하여 직장공이 그 뒤를 이어 마치니 그 범례(凡例)의 발기도 대략은 직장공이 수정(手定)한 것이다. 하편은 부여공과 아산공 두 분께서 부탁하였는데 ...
상파 편을 처음에는 각기 그 종파에 위임하여 주관하게 하였던 것인데 하편의 자손은 서울에 있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부여공도 그 수정(修正)을 맡게 되었다.
그 책이 이루어지기전에 두 분이 잇다라 졸하고 직장공 또한 졸하였다. 그런 뒤 3년 만에 교리공(校理公) 희우(希雨)가 비로소 간역(刊役)에 넣기로 결의(決議)하고는 명전(名錢)을 거두고 일을 주어서 상편은 모두 판각에 붙였고 하편 초본(草本)은 다시 부여공의 재종손 노(魯)에게 부탁하여 수정토록 하였다.
그러나 판각이 절반도 되기 전에 교리공이 또 졸하였다.
갑인 년(정조18年 서기1794年)종회에서 교리공의 아우 희양(希養)에게 부탁하여 그 역사를 대신해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재력이 부족하여 공역이 오랫동안 지연되었다.
병진 년에 가서는 종중에서 지방 수령(守令)으로 나간 곳에 간통(簡通)을 발송하여 공역에 수요되는 물자를 도와줄 것을 상의한 바 나주목사(羅州牧使) 육(堉). 정읍현감(井邑縣監) 희묵(希黙)이 솔선하여 이를 창도(倡導)해 주었고, 평안병사(平安兵使) 율(嵂). 안변부사(安邊府使) 희후(希厚). 이천현감(伊川縣監). 희존(希存). 북청부사(北靑府使). 희원(希遠)이 각기 재물을 내어주었으며 또 찬성공 (휘 순(珣)을 말함)의 손자 호상(好常)으로 하여금 간역을 주관하게 하여 다음해 봄에 전보(全譜)가 비로소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전에 정한 범례와 비교해 볼 때 전전(轉전)하는 동안 참치됨이 없을 수 없었으며 천상(天常)도 교정(校正)에 참여한바 있으므로 범례에 따라 구보에 약간의 산술(刪述)을 가하고 그 수보전말(修譜顚末)을 하단에 붙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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