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관리
ㆍ작성자 청암
ㆍ작성일 2016-07-13 (수)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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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15世 죽오공 (諱國老) 묘비문
 
     
                                                 임국로의 묘지명(墓誌銘)
          
 
           
          
 
 
 
                  국조인물고 (任國老 墓誌銘)
                                                                                                      저자 李山海


吏曹判書贈大匡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任公墓誌銘


 ()의 휘()는 국로(國老)이고 자()는 태경()이었다가 뒤에 태수()로 고쳤으며, 호는 죽오(竹塢)이고 관향은 풍천()이다. 먼 윗대 선조 임주(任澍)는 고려(高麗)에서 벼슬하여 어사(御史)가 되었고, 임자송(任子松)은 시중(侍中)을 지냈고, 임덕유(任德儒)는 풍산군(山君)이 되었고, 임구(任球)는 조선조에 들어와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가 되었고, 참지정사의 아들 임복생(任復生)은 상사(上舍)가 되었고, 상사의 아들 임장손(任長孫)은 통례(通禮)의 벼슬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 임제(任濟)는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 임명필(任明弼)은 참봉(參奉)을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임윤(任尹)은 황주 목사(黃州牧使)를 지내고 이조 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에 추증되었다.

공은 가정(嘉靖)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 32)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보통아이와 달랐다. 7, 8세 때에 시를 잘 지어 성률(聲律)이 구비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공의 시를 전송(傳誦)하였다. 신유년(辛酉年, 1561년 명종 1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임술년(壬戌年)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었다가 관례에 따라 옮겨져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ㆍ호조 좌랑(戶曹佐郞)ㆍ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에 충청 도사(忠淸都事)로 나갔다가 이듬해 기사년(己巳年)에 내직으로 들어와 예조 정랑ㆍ형조 정랑이 되었다. 경오년(庚午年, 1570년 선조 3)에 또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의 보좌관이 되었고, 신미년(辛未年, 1571년 선조 4)에 병조 정랑(兵曹正郞)ㆍ직강(直講)이 되었다. 임신년(壬申年, 1572년 선조 5)에 영접도감 낭관(迎接都監郎官)이 되었다가 파하였고, 다음 해 계유년(癸酉年)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장령(掌令)으로 승진되었고 서윤(庶尹)ㆍ사예(司藝), 내섬시 첨정(內贍寺僉正)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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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년(乙亥年, 1575년 선조 8)에 또다시 정언이 되었는데, 이때 대부인(大夫人)이 돌림병에 걸리자 공이 약을 반드시 먼저 맛보았는가 하면 대변의 맛까지 보았으며, 대부인이 따르지 않으면 더러 한 사발을 다 마실 때까지 눈물을 흘리며 권하였으므로 마침내 병환이 나았다. 공도 뒤따라 병석에 누워 죽을 뻔하였다가 다행히 소생하였다. 그해에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요청하여 나갔다가 겨울에 판서공(判書公)이 병환이 나서 돌아와 병시중을 들었는데, 대간(臺諫)이 벼슬자리를 비웠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파직하였다. 이윽고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상복(喪服)을 벗자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에 임명되었다가 장령(掌令)ㆍ집의(執義)를 역임하고 사성(司成)으로 전직되었으며, 재상 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영남(嶺南)에 내려갔다가 돌아오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고 그 이듬해도 그렇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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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에 군기시 정(軍器寺正)이 되었고 이해에 집의(執義)와 사간(司諫)을 두 번씩 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겨울에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다가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에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승진하였으며, 이듬해 계미년(癸未年)에 승정원(承政院)으로 돌아와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가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전직되었다. 을유년(乙酉年, 1585년 선조 18)에 이조(吏曹)로 전직되었다가 곧바로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는데, 이듬해 병술년(丙戌年)에 중전(中殿)이 병환을 앓다가 회복되자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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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년(丁亥年, 1587년 선조 20)에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 장관을 역임하고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가을에 좌윤(左尹)이 되었으며, 이듬해 무자년(戊子年)에 재차 홍문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다시 사간원과 사헌부의 장관을 역임하였다가 이윽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에 역변(逆變, 정여립(鄭汝立)의 모반(謀叛))이 일어났을 때 당국자의 중상모략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고 지방으로 축출되었는데, 온 집안이 걱정하고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편안하게 취침하고 식사를 하였다. 신묘년(辛卯年, 1592년 선조 24)에 억울하게 화를 당한 사람을 서용(敍用)하라는 명이 내려 사헌부 대사헌으로 소환되었고, 대사헌에서 체차되어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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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도 검찰사(調度檢察使), 분조(分朝)의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어 3년간 호서(湖西)에 머물러 있었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에 아버지 상을 당하고 상복을 벗자 재차 호남 방백에 임명하였으나 병환으로 인해 부임하지 않았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에 중전(中殿)을 호위하고 해서(海西)로 갔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 봄에 이조 참판에서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발탁되었다가 다시 두 번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경자년(庚子年)에 또다시 형조 판서가 되었다가 이조 판서로 옮기었는데, 이때 삼공(三公)의 자리가 비어 누차 물망에 올랐다. 겨울에 파직되었다가 그 다음 해 신축년(辛丑年)에 사면되어 군직(軍職)에 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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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에 공의 맏아들 부제학공(副提學公)이 정주(定州)에서 병에 걸려 들것에 실리어 돌아와 백지촌사(白之村舍)에서 서거(逝去)하자, 이때부터 상심하여 문밖을 나서지 않다가 갑진년(甲辰年, 1604년 선조 37) 9 14일에 병환으로 광릉(廣陵)의 임시 거처에서 졸()하여 광릉의 정평(庭坪) 인좌 신향(寅坐辛向)의 자리에 묻히었는데, 선영의 아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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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평소에 함부로 말하지 않고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고 가산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비록 미세한 일이라도 반드시 여러 번 생각하고 나서 실행하였다. 성품이 순수하고 신중하며 중후하여 일부러 꾸미지 않았고 피차의 간격이 없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중심이 확고하여 세상이 시끄럽게 떠들어도 못 들은 체하고 많은 사람들은 달려가도 홀로 종적을 감추었는데, 이는 대체로 타고난 성품이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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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부인은 종부시 정(宗簿寺正) 한원(韓垣)의 딸인데, 3 1녀를 낳았다. 맏아들
임몽정(任蒙正)은 바로 앞에서 말한 부제학공으로 과거에 급제하였고, 군수(郡守) 조윤신(曺胤申)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맏이 임선후(任善後)는 일찍 죽고, 둘째는 임선복(任善復)이다. 공의 둘째 아들 임취정(任就正)은 과거에 급제하여 서산 군수(瑞山郡守)로 있으며, 판관(判官) 경시정(慶時精)의 딸에게 장가들어 4 2녀를 낳았다. 맏이는 임석후(任錫後)이고, 둘째는 임경후(任慶後)이며 그 나머지는 어리다. 공의 셋째 아들 임수정(任守正)은 과거에 급제하여 전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있었으며 지사(知事) 김우서(金禹瑞)의 딸에게 장가들어 4 3녀를 낳았는데, 맏딸은 유학(幼學) 이상검(李尙儉)에게 시집가고 그 나머지는 어리다. 공의 딸은 종실(宗室) 파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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